[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3) 여정남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3) 여정남 | |
몇 년 전 광주 학회에 갔을 때다. 학회는 낮에는 도반들이 강의실에 모여 식견과 환자 진료에 관한 지식을 토론하며 배우고 밤에는 맛집에 가서 음식을 앞에 두고 공부를 하니 정말 즐거운 모임이 아닐 수 없다. 이날도 우리 의국원들은 그렇게 낮 공부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려고 그곳 명물인 떡갈빗집으로 몰려갔다. 홀에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었고 프로야구를 중계하고 있었다. 당시 광주팀인 타이거즈와 부산팀인 자이언츠의 시합이었다. 방에 들어가 침을 흘리며 기다려도 종업원이 오지 않는다. 몇 번이나 호출하니 그제야 와서 “지금 우리 팀이 이기려 하고 있걸랑요. 조금만 기다리시오. 이기면 오늘 저녁 식사 전부 공짜로 줄랑게”라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고 갔다. 그날 타이거즈는 졌고 저녁값은 우리가 냈다. 그 종업원 아주머니는 타이거즈가 자이언츠를 이기길 원한 게 아니라 광주가 부산에 이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대통령 선거 때 국민은 프로야구팀을 응원하는 것과 같다. 후보자가 속한 당은 무엇을 내세우는 곳이며 그 사람의 인간성이나 공약은 어떤 것인지는 뒷전이다. 다만 그 사람의 고향이 어디냐가 대통령 뽑는 주요 관심사가 된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때 데모를 하다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는데 우리 과 친구가 “너는 대구 사람인데 왜 데모를 하는 거야?”라고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가 도예종 등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그리고 학생들이 북한과 내통해 인민혁명당(인혁당)을 결성하고 국가를 뒤집을 음모를 꾸몄다며 그 명단과 사건 경위를 발표했다. 좌파 쪽은 박 전 대통령이 인혁당 사건을 날조하였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우파 쪽은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며 나라가 결딴날 뻔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에서는 중앙정보부에서 넘어온 사건이 석연치 않다고 기소하지 않겠다며 젊은 검사들이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일이 이렇게 꼬이자 검찰 고위층에서 처음 피의자들에게 적용했던 국가보안법을 변경해 반공법으로 법원에 기소하도록 지시를 했다. 지방법원은 1965년 1월 20일 도예종은 징역 3년, 양춘우는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나머지는 전부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5월 29일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피고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까부는 놈들에게 따끔하게 경고를 해주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어르고 협박해도 대통령에게 덤벼드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왔다. 박정희 쪽에서는 ‘대망의 70년대’를 외치며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는데 왜 참지 못하고 덤벼드느냐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시민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로 할 걸 왜 교도소에 보내고 기관에 끌고 가서 두들겨 패느냐고 불평했다. 1970년이 되면서 이북보다 못살던 우리가 더 잘살게 됐다. 나라 살림살이가 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떤 취객이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서 택시를 타고 이문동 자신의 집으로 가면서 차 안에서 박정희를 욕했다. 이문동 삼거리에서 차가 승객의 동네인 오른쪽으로 가지 않고 왼쪽 장위동 쪽으로 갔다. 그쪽에는 중앙정보부가 있는 곳이다. “기사님 이거 방향이 틀린 거 아니오?”라고 승객이 말하자 “이 새끼야 입 닥쳐!”라고 운전사가 거칠게 말했다. 그 당시 ‘카더라 통신’으로는 중앙정보부 끄나풀이 약 60만 명이었다고 했다. 그들이 택시는 물론 다방, 술집에까지 쫙 깔렸다고 했다. 취한 김에 대통령 욕하다 중앙정보부나 경찰에 잡혀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소위 막걸리 반공법에 걸린 사람들이다.
여정남은 대구 토박이다. 1944년 5월 7일생으로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학생회장까지 했다. 이때까지 그의 인생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반독재 투쟁의 앞줄에 서게 된다. 대학 3학년 때 한일국교정상화 반대투쟁하며 싸우다 세 차례 제적과 복학을 되풀이하다가 1965년 입대하게 된다. 1969년 제대해 복학하고 나서 경북대의 지하 모임인 정진회에 가입하면서부터 그의 본격적인 학생운동이 시작된다. 1971년 4월 경북대에서 열린 전국학생 서클 학술토론회에서 ‘반독재 구국선언문’에 월남전 파병을 ‘용병’(傭兵)이라고 표현해 구속됐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계엄령이 선포됐다. 1973년 11월 3일 경북대학교 유신반대 투쟁에 학생 2천여 명이 참여하게 됐는데 여정남은 이때 주동자로 일시 구속된다. 그해 12월 서울로 올라간 여정남은 이철, 유인태 등을 만나 반독재에 대한 전국 대학의 효과적인 연대투쟁을 계획한다. 학생들의 저항에 궁지에 몰린 정부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한다. 여정남은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와 연계투쟁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이름으로 서울 시내에 유인물을 배포하고 각 대학생의 반유신 시위를 주도하게 된다.
정부는 이런 학생 저항 운동의 주체인 민청학련의 배후가 1964년 소멸한 인혁당의 재건위원회라고 지목을 하고 여정남은 인혁당 재건위원이란 죄목으로 잡아들였다. 재판에서 1심,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고 그 이튿날 여정남은 다른 동료 7인과 함께 처형이 된다. 이때 함께 처형된 사람은 서도원(52·매일신문 기자), 도예종(51·삼화토건 회장), 하재완(43`양조장 주인), 이수병(37·삼일일어학원 강사), 김용원(39·경기여고 교사), 우홍선(45·한국골든템프사 상무), 송상진(46·양봉업) 그리고 여정남(31·경북대 학생회장) 등이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대구 사람들을 보고 수구꼴통이라며 비아냥거린다.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대구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 때 많은 덕을 보고 출세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당시 법원에서 재판받아 사형당한 사람들은 대구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은 모른다. 전라도 사람은 없다. 이 여덟 사형수는 한 사람이 부산 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대구 사람이다. 한심한 일은 대구 사람들조차도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고향이 어딘지를 모른다. 대구는 삼성 야구밖에 없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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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재 미주정신병원 진료원장
1969년 9월 계명대학교 데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