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근대문화유산 답사기공모전 입선 수상작
돌담길 그 공간의 미학- 대구 옻골마을 옛담장
글 : 김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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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골마을 입구]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44-1번지에 소재한 등록문화재 제266호(등록:2006.06.19)인 옻골마을 옛 담장을 답사한 것은 9월 어느 날이었다. 3년 전부터 평소 학교 교사문화답사회를 통해 여러 곳의 문화답사를 해 왔고 개인적으로도 틈만 나면 불연 듯 답사를 떠나곤 했던 나는 산사의 건축물과 고택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일명 문화답사병에 걸려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새로운 무언가에 나도 모르는 새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택과 어울림을 가진 돌담길이었다. 특히 나는 이른 밤에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401-2번지에 있는 남평문씨 세거지(世居地)에서 달빛과 수은등 빛이 고택의 대문으로 향하는 길을 두고 양쪽 옆으로 펼쳐진 투박한 돌담과 길과 회화나무를 비추고 있는 그 야경은 오로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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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과 능소화] | 이런 멋에 젖은 나는 어김없이 밤이 찾아오면 으레 회화나무가 있는 그 곳을 찾아가 잠시 일상을 놓곤 하였다. 그 후로 나는 경주 최씨마을, 양동마을, 닭실마을, 도동서원, 병산서원 등을 답사하면서 돌담길의 정취를 마음껏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답사에서 더욱 더 옻골마을의 옛 담장이 눈이 시리도록 보고 싶었다. 복숭아가 땅에 떨어지면서 가을로 접어들려는 청명한 날씨속에 답사를 시작했다. 대구광역시 동구 방촌역(지하철) 비행장 뒤편으로 가다보면 기차 신호등이 걸려있는 철길을 지나 계속 직진하여 해안초등학교를 지나 안쪽 끝 능청산 자락 아래에 도착하면 옻골마을이 나온다. 마을입구에서 제일 먼저 나를 반갑게 맞아준 것은 수령이 350년 되었다는 느티나무 숲과 회화나무 두그루였다 특히 회화나무 두 그루는 처음 마을을 세운 대암 선생의 이름을 따 ‘최동집 나무’라고 불린다. 이들은 이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한 노거수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상주하고 있는 그 곳 문화해설사도 관광안내소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고 마을의 모습은 너무 고즈넉하다. 우선 관광안내소에 놓여져 있는 안내책자를 살펴보았다. 안내서에는 옻골마을은 경주 최씨 칠계파(漆溪波)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동성 촌락(同姓 村落)으로 현재 20여 호의 고가들로 어우러져 있고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 대구의병장으로서 왜적을 격파하고 많은 공을 세워 공신이 된 태동공(台洞公) 최계(崔誡)선생의 아들인 대암(臺巖) 최동집 선생이 1616년에 정착하여 380여 년간을 이어오고 있다. 마을 이름은 과거에 시냇가에 옻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뒷산 정상에는 기이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형상이 거북을 닮았다고 해서 일명 생구암(生龜岩)으로 부르는데 풍수 지리학상 거북은 물이 필요하다 하여 마을 입구 서쪽에 연못을 조성하였으며, 동쪽은 양의 기운을 받기 위하여 숲을 만들지 않았고, 서쪽은 음의 기운을 막기 위하여 연못 주위에 울창한 느티나무 및 소나무 숲을 조성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처럼 옻골마을의 입지가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면 이와는 달리 건물의 배치방식을 살펴보면 성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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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과 토담] | 토담길이 약 2,500m의 토석담과 돌담 전체적으로 둘러보기 위해 좌측부터 답사하기 시작했다. 좌측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우깟댁, 교동댁, 양자골댁로 가는 중간 중간에 고택들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허리높이의 담장들이 아기자기하게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다. 특히 중매댁, 월연댁, 하회댁, 도평댁, 구 수구당 양 사이로 있는 돌과 흙을 사용한 토석담과 자연석 그대로의 돌과 흙을 번갈아 쌓아 만든 돌담의 담장들은 집과 집을 구분해주고 이 집과 저 집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웃과 이웃을 연결 해주는 소통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돌담들은 우리 조상들의 때 묻은 역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나고 제각각인 돌들은 거친 황토빛 흙과 뒤엉킨 채로 모자라는 부분들을 서로 채워주며 그렇게 제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또한 세월 속에 해묵은 돌담들과 원근법적 돌담길에서 우리는 잠시 잊고 있었던 본래의 심성을 되찾는다. 최씨 종가(백불고택)로 들어가는 좌우는 막돌과 황토 흙으로 쌓은 담장위의 기와는 품새가 야무지면서 정직한 양반의 체통이 한결 느껴졌다. 그리고 담장너머로 고개를 쭉 내밀고 있는 능소화와 담장의 조화로움은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한 폭의 뛰어난 미술품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골목길이 끝나자 곧장 종가대문이 가로막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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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대문 앞] | 좌측 담장은 불규칙적으로 돌들과 흙을 촘촘하게 쌓아 만들었고 우측 담장은 질서정연하게 가로질러 담장을 만들었다. 중앙의 담장 길은 지금은 시멘트로 포장되었지만 오래전의 사람들은 짚신이 땋을 정도로 자연적인 이 길을 거쳐 종가 댁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 중사랑, 대묘, 별묘, 행랑채, 고방채 보본당 등이 담장을 경계로 균형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주어진 공간 속에 나름대로 정원식으로 붓꽃, 남천, 배롱나무, 반송, 옥잠화 등을 심어 독립적으로 집의 형태에 걸맞은 정원 구조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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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로 가는 토담길] | 이처럼 담장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 대해 다분히 사상적 철학적면이 깃들어 있다고 하겠다. 종가에 나와 발길을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아들인 동계(東溪) 최주진 선생의 학문을 기려 세운 정자인 동계정으로 돌렸다. 자손들의 강학 장소로 이용되어 왔던 이 정자는 사방으로 넓은 담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의 풍광이 마을에서 가장 절묘하다고 한다. 자물쇠로 잠겨져 있어 안으로는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산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 길가에 앉아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잠시 더위를 피했다. 좁은 돌담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나오니 동산서원 옛터가 나왔다. 한창 보수공사중이라 자세히 답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마을 입구 쪽으로 나오다 보니 마지막으로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효자비각인 정려각(?閭閣)이 저만치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정려각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의 그 투명한 색깔이 오늘따라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나는 경주 최씨 집성촌인 옻골마을을 둘러보고는 사람과 집과 자연을 멋들어지게 연결해 주는 매개체는 돌담과 돌담길이란 사실을 이 곳에서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