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화문 (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中庸』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금천교 (錦川橋)
금천교는 1411년(태종11년)에 축조된 돌다리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특히 창덕궁의 돌다리는 그 아래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비단(錦)에 내 천(川)자를 사용하는 錦川橋이다.
다리 아래에는 남쪽의 해태상, 북쪽에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쫓는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벽사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아름다운 난간석과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이 돋보인다.
인정문 (仁政門: 보물 813호)과 인정전 (仁政殿: 국보 225호 )
인정문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잡상 :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 까치!
선정전 (宣政殿: 보물 814호)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이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史草)라고도 하며 이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경훈각은 대조전의 부속 건물로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지었다.
수라간은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내부는 조선 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순종황제의 비)가 사용했던 침대
희정당 (熙政堂: 보물 815호)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다.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총석정절경도>가 걸려 있다.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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