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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성곽순례-창의문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은 성곽 도시였다. 하지만 그 이름이 경성(京城)과 서울로 바뀌면서 성곽도시의 면모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도시의 성장이 주요 원인이었다. 성벽은 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쌓는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건국과 동시에 많은 인력을 동원해 무리하다시피 성벽을 쌓았다. 그만큼 성벽이 중요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전투와 관련한 서울 성곽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왕실은 적이 쳐들어오면 피란을 떠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결국 성곽은 수도를 그 주변과 구분 짓는 경계성 노릇을 했을 따름이었다. 성 안에 있는 자와 성 밖에 있는 자의 차별과 더불어 말이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그나마 명목을 유지했던 성곽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1907년 요시히토(嘉仁) 황태자의 방한을 계기로 ‘성벽처리위원회’라는 이상한 기구까지 만들어 성벽과 성문을 없애 나갔다. 황태자의 통행을 위해 숭례문 바로 옆의 성곽을 헐고 새로 도로를 냈다. 옛 모습은 그렇게 서서히 지워져갔다.
다행히 최근 성곽에 대한 관심과 복원 노력으로 예전의 모습이 점점 살아나고 있다. 언젠가는 성곽만을 따라 옛 한양 경계를 일주해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성곽 스케치 답사는 창의문에서 시작했다. 숭례문이 불탄 이후 옛 모습으로 남아있는 성문은 창의문(북소문)과 흥인지문(동대문)밖에 없다. 산 위에 있는 창의문은 흥인지문보다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그만큼 호젓해 개인적으로는 더 즐겨 찾는 곳이다.
창의문은 북인을 기반으로 한 광해군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서인세력 거사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패륜행위와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모아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성공적으로 인조 시대를 열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창의문 문루 안에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이 걸려 있다.
성문 아래에서 600여 년을 버티고 서 있는 육축의 무사석을 어루만져 봤다. 적군이 아닌, 반정군의 도끼에 부서지면서 잠시 역사에 출현했던 창의문을 생각했다. 햇살의 온기를 머금은 돌은 이미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는 듯 따뜻했다.
창의문 스케치를 끝낸 후 성곽을 따라 인왕산 정상까지 올랐다. 바람이 부는 만큼 기분도 함께 살랑거렸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성곽들은 용이 꿈틀대듯 역동적으로 산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선 끝까지 한껏 눈길을 보내 본다. 미래의 서울에서는 성곽의 선이 역사 속 ‘단역’이 아니라 당당한 ‘주역’이 된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서울은 분명 멋진 도시로 세계 속에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화답이라도 하듯 새로 얹은 하얀 빛깔의 화강암 여장이 햇살 아래 반짝거렸다. 그 길을 따라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돈의문(서대문)을 향해 다시 발길을 옮겼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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