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인곡(思美in谷)/기타

겸재 정선의 鞍峴夕烽(안현석봉)

思美 2009. 5. 19. 19:28
728x90
반응형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2층에 안현석봉이 전시되어 있었다.

겸재가 양천 현령으로 있을 당시 한강너머 안산을 바라보며 저녁에 피어오르는 봉화불 갯수를 헤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셨단다.

안산위 봉화불이 요즘 누군가가 그렇게 싫어하는 촛불같기도 하고 호롱불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너무 재미나게 묘사되어 있다.

언제 안산을 다시 올라 강너머 양천을 바라보리다.

 

[유홍준의 국보 순례] [24] 겸재 정선

  •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 입력 : 2009.09.09 21:54 조선일보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한국적 산수화풍을 하나의 장르로 완성해낸 한국화의 화성(畵聖)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겸재 서거 250주년을 기념하는 '겸재 정선전-붓으로 펼친 천지조화'(11월 22일까지)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되었던 '겸재화첩' 등 미공개작을 포함하여 총 142점이 출품되어 있으니 겸재 사후 열린 몇 차례 대규모 기획전 중 하나이다.

겸재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거장의 명작에 대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명문(名文)의 평론이 있어 그 예술세계의 진수를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키게 되는 법이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1686~ 1761)이 겸재의 '구학첩(丘壑帖)'에 붙인 발문(跋文)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관아재는 당대의 문인화가로 겸재와 서울 순화동에서 이웃하며 평생 벗으로 살았기 때문에 겸재를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는 없다고 자부하며 "그가 쓰고 버린 붓을 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동안 우리나라의 산수화가들은 중국 화본(畵本)에 나오는 방법을 따랐기 때문에 산세와 계곡이 여러 모습이어도 똑같은 필치로 그리면서도 아직껏 이것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겸재는 일찍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 마주하고 그렸고, 내금강·외금강을 드나들고 영남의 경승을 두루 편력하면서 그 산세와 계곡의 형태를 다 알고 그렸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의 병패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는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필자 의역)

그리하여 관아재는 평하기를 겸재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볼 수 없던 대가로 중국의 송·원·명의 대가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겸재의 진경산수가 갖고 있는 미술사적·문화사적 의의이다. 이런 거장의 추모전을 우리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만약 지금 보지 않으면 아마도 50년 뒤 300주기 때나 보게 될 것이다.
728x90
반응형

'사미인곡(思美in谷)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산 -2009/7/25-  (0) 2009.07.28
안산 -2009/7/5-  (0) 2009.07.12
[스크랩] [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⑭]안현석봉  (0) 2009.05.19
2009년 4월 26일 무학산  (0) 2009.05.06
모락산 2008.7.5.  (0) 2008.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