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7/11
안현은 안산(鞍山) 또는 모악산(母岳山)이라 부르는 서울의 서쪽 산이다. 봉원사(奉元寺)와 연세대 및 이화여대를 품고 있는 높이 296m의 산이다.
한양의 내백호(內白虎·명당의 서쪽을 막아주는 안쪽 산줄기)인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다시 갈라져 인왕산 서쪽을 겹으로 막아주고 있으니 한양의 외백호(外白虎)에 해당한다.
이 산을 안산 또는 안현이라 부르는 것은 산 모양이 말안장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길마는 안장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아마 안현이나 안산은 길마재의 한자식 표기일 것이다.
모악산 또는 모악재라 부르는 것은 풍수설에 의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서울의 조산(祖山·풍수설에서 명당의 근원이 되는 으뜸산)인 삼각산(북한산)은 부아악(負兒岳·애 업은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를 업고 서쪽으로 달아나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서쪽 끝의 길마재를 모악(母岳·어미산)이라 하고 그 아래 연세대 부근 야산을 떡고개라 했다 한다. 어미가 떡으로 아이를 달래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런 길마재 위에는 태조 때부터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여 매일 저녁 봉홧불을 올리게 했다. 무사하면 봉홧불 하나를 올리고 외적이 나타나면 두 개, 국경에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침범하면 네 개, 싸움이 붙으면 다섯 개를 올리도록 했다. 따라서 평화시에는 늘 봉홧불 하나가 길마재 상봉에서 타오르기 마련이었다.
원래 길마재에는 동서 두 봉우리에 각기 다른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동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지 쪽에서 전해오는 봉홧불 신호를 경기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봉대산(烽臺山)에서 받아 목멱산 제3봉수대로, 서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다 쪽 봉화 신호를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 고봉산(高烽山)봉수대에서 받아 목멱산 제4봉수대로 전해주게 돼 있었다.
그러니 중국 쪽에서 외적이 침입하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이 안현봉수대의 불꽃 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안현의 봉홧불이기에 겸재는 영조 16년(1740) 초가을에 강 건너 양천(현재 양천구)의 현령으로 부임해 가서는 성산 아래인 현재 가양동 6 일대의 현아(懸衙)에 앉아 틈만 나면 이 길마재의 저녁 봉홧불을 건너다보고 나라의 안위를 확인했던 것 같다. 그쪽 방향은 바로 자신의 고향집이 있는 한양이기도 했다.
한 가닥 촛불처럼 피어오르는 봉홧불은 오늘도 서북지역이 무사하다는 신호인데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길마재 너머로 인왕산과 북악산이 초저녁 어둠을 안고 더욱 뚜렷이 다가온다. 하늘이 멀어지고 먼 산이 가까워지는 초가을 어느 맑은 날 해거름에 소슬한 가을바람이 수면을 타고 소리없이 들어와 문득 겸재의 그리움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인왕산 아래에는 식솔들이 기다리는 고향집이 있고 북악산 아래에는 평생 뜻을 같이하는 그리운 친구 사천 이병연(쏏川 李秉淵·1671∼1751)이 있었다. 그래서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정든 고향 산천의 모습을 먼 경치로 능숙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자신이 앉아 있는 양천 관아 서쪽 소악루(小岳樓) 일대의 한강 이쪽 경치도 서호(西湖)나 소동정호(小洞定湖)로 부를 만큼 넓어진 한강의 너른 강폭과 함께 대담하게 그려내어 강과 산이 어우러지도록 했다.
돛단배 몇 척을 띄워도 드넓은 강물이 채워지지 않았던지 광주바위와 허가바위를 끌어내어 음양의 조화를 통해 화면 구성을 완성시켰다. 사진기로는 잡히지 않는 구도다. 시각의 한계를 초월한 이런 화면구성이 바로 겸재의 화성(畵聖)다운 면모다. 1740년 비단에 채색한 23.0×29.4㎝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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