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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東闕圖)-1820년대 창경궁,창덕궁의 모습 (사진이 안보여 다시 올림)

思美 2010. 4. 1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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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東闕圖)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을 했고 가로576cm 세로 273cm이며 국보 제 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작 당시에 2벌을 만든 듯, 이 그림과 크기와 기법이 같은 것이 또 하나 있다. 보물 제596호인 궁궐도(宮闕圖, 동아대학교 박물관)인데, 동궐도가 궁궐 안팎의 나무와 언덕, 산의 묘사에서 원체풍으로 좀더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본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으므로 '동궐'이라고 한다. 이 그림의 작자는 미상이나, 도화서(圖畵署)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제작연대는 순조(純祖, 23대) 26년에 만든 전사(田舍)와 순조 30년 소실된 경복전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1826년에서 1830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그림에는 주변의 산에 둘러싸인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경이 오른쪽 위에서 내려다 보는 평행투시도법의 시점으로 포착되어있다. 당시 궁 안에 실재하던 모든 전당과 누정, 다리, 담장은 물론 연못, 괴석 등의 조경과 궁궐외곽의 경관까지 정밀하게 그렸다. 이를 통해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계화(界畵 : 자[尺]와 같은 보조기구를 써서 정밀히 그리는 그림) 기법을 엿볼 수 있다.
동궐도는, 그 예술적 가치보다는 궁궐건물 연구에 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평면도인 '동궐도형(東闕圖形)' 보다도 더 시각적으로 광대한 두 궁궐의 전체 모습을 나타냈고, 더불어 각 건물마다 이름이 명기되어있어서 창덕궁과 창경궁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궐도형(東闕圖形)

만든이는 알 수 없음. 가로338.4cm 세로593.2cm 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다. 근대식 지도제작 기법으로 동궐(창덕궁, 창경궁)을 그린 평면도이다. 1908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너비 1.2cm정도의 격자(grid) 위에 각 건물들의 모양 및 크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동궐도(東闕圖, 1830년경)'와 견주어 보면, 그동안 여러 건물이 없어지고,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궐도는 건물 생김새는 입체적으로 자세히 나타냈으나 위치가 부정확하고, 동궐도형에서는 건물 생김새는 알 수 없으나 위치와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두 지도를 함께 분석하여 창덕궁과 창경궁 원형복원에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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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없던 시절, 회화는 시대의 모습을 남기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위세를 떨쳤던 문인화 외에도 계회도·의궤·궁궐도 등 기록화를 통한 기록문화가 융성했다. 〈조의사속,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展〉(고려대 박물관 2001.5.5∼6.30)은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는
국보 제249호 〈동궐도〉를 비롯, 각종 국보급 기록화를 선보였다. 단순한 기록의 차원을 넘어 예술사적 가치를 획득한 기록화의 세계로 들어가본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동궐도> 비단에 채색 19세기
국보 제 249호

 

 

고려대 박물관이 지난 5월 5일부터 6월 30일까지 마련한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전〉은 금년도 미술계의 빅 이벤트이자 근자에 보기 드문 알찬 고미술 전시였다. 고려대 박물관에서는 일찍이 1972년에 27점의 기록화를 모아 〈조의사속전(朝儀士俗展)〉을 가진 적이 있었다. 30년 만에 도서관 소장의 지도와 의궤도첩 등을 보강하여 42건 87점의 대규모 기록화 전람회를 꾸민 것이다. 이번 특별전에도 궁중의례와 사대부의 풍속이라는 뜻의 ‘조의사속’을 전시부제로 재활용하였다.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전〉이 36회째 특별전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최근 박물관을 활성화하려는 최광식 관장의 의욕이 돋보이는 전람회였다. 공간이 비좁은데도 폭이 6m에 육박하는 대작 〈동궐도〉와 〈반차도〉의 전면을 펼친 전시실의 꾸밈새는 김우림 학예연구관의 노하우를 잘 보여 주었다. 그리고 최근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정혜 교수가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하여 전시도록의 총론과 도판해설을 맡았다. 총론에는 또 오종록 교수의 ‘기록문화의 역사적 성격’과 이은주 교수의 ‘기록화 속의 복식문화 읽기’를 곁들여 학술적 위상을 갖추었다.
이번 특별전은 궁중의례, 사가의례(士家儀禮), 역사고사(歷史故事), 궁궐도 및 지도, 그리고 의궤(儀軌) 등 5부로 구성되었다. 전시를 통해 조선시대 기록화의 분류를 시도한 점은 적지 않은 성과라 여겨진다. 시기적으로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기록화의 전모를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소장품이 다양하고 풍부한 편이다.

국보급 문화재로 대접받는 기록화들
조선시대 기록화는 근래에 와서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이번 특별전의 얼굴이라 할 창덕궁 전경그림 〈동궐도(東闕圖)〉는 국보 제249호로, 김정호의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는 보물 제85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1609년의 〈사계정사도(沙溪精舍圖)〉, 17세기 후반의 〈해동팔도봉화산악도(海東八道烽火山岳圖)〉, 17∼18세기의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 1743년의 〈대사례도(大射禮圖)〉 등은 지정 문화재에 버금가는 사료다.
이들 가운데 〈사계정사도〉는 이번 특별전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원본그림인데, 16세기 계회도의 형식적 전통을 이은 회화사적 의미가 큰 작품이다. 사계정사는 사계 방응현(沙溪 房應賢, 1524∼1589)의 남원지방 은둔처로, 손자인 방원진(房元震)이 할아버지의 뜻을 승계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정사를 복원하여 그린 기념화가 〈사계정사도〉다. 방원진은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존경받는 우국지사였다. 그림 아래에 제발(題跋)을 쓴 현옹 신흠(玄翁 申欽)과 교분이 두터웠고, ‘사계거사묘갈명(沙溪居士墓碣銘)’은 이정구가 짓고 김현성이 썼으며, 전서는 김상용이 썼다. 이들 모두 당대의 손꼽히는 문필가들이다. 방원진은 산림처사이면서도 서울의 명사들과 그같이 교류했고,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에게 받은 사계정사기를 포함한 홍영·윤계영 등 당대 문사(文士)들의 송별시 서첩이 세간에 전해 온다. ‘전가보완(傳家寶翫)’이라는 표제(表題)로 볼 때 종가에서 흘러나와 그림과 분리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계정사도〉 그림 역시 당대에 빼어난 화원의 솜씨로 여겨진다. 부감시(俯瞰視)로 너른 풍광을 잡은 수묵산수도로 사생화는 아닐 터인데, 방원진의 현장 설명을 듣고 상상하여 그린 탓인지 현장감도 살짝 느껴진다. 멀리 솟은 산세는 지리산이겠고, 정사를 감싸고 흐르는 하천은 섬진강 줄기인 요천이겠다.

한편 도서관에서 발굴한 〈계미동경소진첩(癸未同庚小眞帖)〉이 눈길을 끈다. 이는 이익진·조영진·이규채·한익모·송진흠·신만·유언술 등 계미생(1703년)인 7명의 관복차림 흉상 초상화와 1771년 10월에 쓴 유언술의 서문으로 꾸며져 있다. 동갑내기 모두 고관을 지낸 기념으로 자기들끼리 뜻을 같이하여 초상화첩을 제작했던 모양이다. 어명이나 국가의 규정을 벗어나 그처럼 화원을 초빙하여 관복초상을 그린 점은 조선 후기 사대부 문화의 색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선조의 음덕을 기리는 모사본 조선시대 기록화는 후대에 다시 베껴 그린 모사본이 적지 않다. 계회도나 궁중에서 이루어진 행사 그림의 경우 참여 인원수에 따라 제작되기도 했는데, 후손들이 그것을 망실했거나 손상했을 때는 모사본을 만들어 선조의 영광을 기려 왔다. 모사작업은 20세기까지 지속되었고, 인쇄본으로까지 보급되었다.

이번 전시작 가운데 16∼17세기의 기록화 대부분이 후대의 모사본이다. ‘남씨전가경완(南氏傳家敬翫)’이라고 표제를 쓴 두루마리는 의령 남씨 집안에 내려왔던 것으로,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세 폭으로 꾸며져 있다. 같은 내용의 그림을 포함하여 화첩으로 꾸며진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이 원본격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품에서 앞의 두 점은 왕이 내리거나 직접 참여한 기록화로 18세기 모사화인 데 비해, 마지막 폭의 제작시기는 19세기 이후로 더 늦다.

광해군 때의 〈송도용두회첩(松都龍頭會帖)〉, 명종 때 행사였던 〈서총대친림사연도첩(瑞蔥臺親臨賜宴圖帖)〉, 인조 때 일인 〈임오사마방회도첩(壬午司馬榜會圖帖)〉, 현종이 내린 〈이경석사궤장연회도첩〉, 역시 현종 때의 일인 〈만력기유사마방회도첩(萬曆己酉司馬榜會圖帖)〉, 영조 때 있었던 〈금오계첩(金吾契帖)〉 등도 모두 후대의 모사본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록화 모사도는 다른 감상화들의 임모작이 지닌 가치하락과 달리, 나름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모사본을 통해 원본을 유추할 수 있고, 또 원본을 그렸던 당대 행사를 검토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사본은 꼭 빼닮게 그린 경우에도 세밀함이나 회화성이 떨어지고, 자연히 모사되는 시점의 형식이 가미되기도 하므로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예컨대 현종이 70세에 은퇴하는 고관 이경석에게 궤장을 하사하는 장면의 〈이경석사궤장연회도〉나 1609년 과거에 급제한 동기생들이 60주년 기념으로 가진 〈만력기유사마방회도첩〉에는 17세기 후반의 행사였는데도, 후대에 이모(移模)되면서 18세기 중엽 영조 이후에 사용된 바퀴 달린 가마가 등장한다. 〈송도용두회첩〉 같은 경우는 원본과 무관하게 19∼20세기에 그린 그림이다. 선조 때 행사였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는 20세기의 모사본이다.

독창적인 18세기 궁중기록화의 형식미
조선시대의 기록화는 주요 행사들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해 놓은, 문헌자료에 못지않은 역사물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왕실행사나 고위관료들에게 내린 향연 등에 한정되어 있지만, 한국회화사에서 조선시대를 ‘기록화의 왕조’라 이를 만큼 방대한 양이 전한다. 세자 책봉이나 왕위 등극, 혼인, 국상 등 왕실의 주요 의례를 담은 반차도(班次圖)를 비롯해서 조선시대의 기록화에는 연회방식과 음악과 같은 의례(儀禮) 구성은 물론이려니와,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복식까지 그 시대의 사회상과 생활문화가 낱낱이 담겨 있다.
또 〈동궐도〉 같은 예를 통해 당대의 궁궐구조와 건축문화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화가 미술사연구에서 소홀히 다루어진 것은 수묵산수화나 감상화를 중심에 놓은 왜곡된 인식 탓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꼼꼼한 채색화 위주의 기록화는 주문에 의해 제작되어, 작가가 밝혀진 경우가 극히 드물고, 예술적 순수성이나 창조성이 결여된 영역으로 치부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록화는 형상 기록의 의미와 장식성은 물론, 회화성과 예술적 기량까지 뽐낸다. 초상화와 함께 조선시대 회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도화서 화원들의 주된 업무가 기록화 제작이었음을 염두에 둘 때 더욱 그렇다. 또한 조선시대의 기록화는 도식화하고 틀에 박힌 것으로 보기 쉬우나, 시대에 따라 주제와 형식의 변화를 보이는 미술사적 사료로도 충분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기록화는 순수 감상화 못지않은 예술사적 가치를 지닌 영역인 것이다.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관료들의 모임이나 행사를 담은 계회도 형태의 기록화가 주류를 이룬다. 이는 조선의 사회와 문화를 구축한 사대부의 시대적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 탓에 16세기 계회도류는 행사장면의 디테일보다 문인 취향의 관념적 수묵산수화풍으로 그려졌다. 16∼17세기에 임금이 하사한 향연이나 행사의 기록화에서는 행사장면 중심의 채색화 형식이 두드러졌다.

조선시대 기록화의 진면목이라 할 궁중의례의 기록화는 양적 증가, 크기, 회화적 기량 등 역시 18세기에 발전하였다. 그만큼 영·정조 시절의 문화역량이 컸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같은 거장들이 배출되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18세기 궁중기록화의 양식적 정착과 새로운 변모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1743년의 〈대사례도〉권과 1795년의 〈수원능행도〉 병풍을 들 수 있다.
1743년 윤 4월 7일에 영조가 성균관에서 관료들과 활쏘기 행사를 가진 기념으로 제작된 〈대사례도〉권은 〈어사도(御射圖)〉, 〈시사도(侍射圖)〉, 〈상벌도(賞罰圖)〉 세 그림과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밝힌 좌목(坐目)으로 구성된 화첩이다. 행사 장면에 포인트를 맞추어 참여자들을 도열해 놓은 세 그림은 조선시대 기록화의 전형을 보여 준다. 전체 행사는 위에서 내려다보듯 부감한 평면도식으로 배열하면서 인물이나 건물, 수목 등 각각의 경물(景物)들은 옆에서 본 입면도로 그린 독특한 구성법이 그렇다. 서양 회화식 투시도법을 염두에 두면 어색하고 원시적인 표현으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평면도와 측면도의 조합은 행사장면을 면밀하게 서술하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라 여겨진다. 더불어 수직과 수평구도는 궁정행사의 권위와 장엄함을 표현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형식인 셈이다.
이와 달리, 건물과 풍경을 함께 담는 전경도(全景圖) 형식의 기록화는 17세기부터 사선식 구도가 활용되었다. 이 방식은 1664년 길주와 함흥에서 치렀던 과거시험 행사를 한시각이 그린 〈북새선은도권(北塞宣恩圖卷)〉에 잘 나타나 있다. 관아 건물의 사선식 배치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행사장면, 그리고 주변 풍광을 파노라마로 잡은 두 폭의 기록화다.
 
궁중기록화의 전성시대, 19세기
경물을 입면으로 포착한 평면도식과 사선식 구도법의 장점을 살리면서, 서양화의 투시도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시대 기록화의 새 형식을 완성한 것이 〈수원능행도〉 병풍이다. 조선시대 기록화의 최고이자 양식적 전환점을 이룩한 대작이라 할 수 있다.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년을 맞아 수원(당시의 화성(華城))에서 벌인 대규모 행사도(行事圖) 8폭 병풍이다.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낙남헌양노연도(洛南軒養老宴圖)〉 등은 행사장면만을 포착한 전통적인 평면도식 구성이고,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殿拜圖)〉는 사도세자릉인 현륭원(顯隆園)의 주변 풍경을 함께 포착했으면서도 행사장면은 평면도식으로 포치한 그림이다. 이에 반해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는 사선식 구성법을 활용하여 수원성 전체를 한 화면에 담아 냈으며,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는 멀리 갈수록 좁아지는 배다리 표현에 서양화식 투시도법이 적용되었다.
 
특히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는 ‘之’자형 구도로 대행렬의 파노라마를 한 화면에 응축해 놓은 감동적인 기록화다. 이 병풍에는 행사장면뿐만 아니라 구경 나온 사람들까지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점 또한 새로운 시도다. 김홍도의 〈북일영도(北一營圖)〉와 〈남소영도(南小營圖)〉가 보여 주듯이, 18세기 풍속화의 영향이 기록화에 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수원능행도〉 병풍이 포함되지 않아 아쉬웠지만, 1795년 행사를 판화로 새겨 책으로 꾸민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와 1794∼96년에 시행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서운함을 메워 주었다. 두 의궤첩에는 〈수원능행도〉의 장면들과 수원성 설계도면이 판화로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판화사의 백미이기도 하다. 이들 판화의 구성법과 묘사방식은 김홍도의 화풍을 골간으로 하였으며,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밝혀진 대로 이인문·김득신·장한종 등 조선 후기 회화를 꽃피운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이 완성한 형식미와 예술성은 19세기 궁중기록화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한번 구축된 예술형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19세기에는 이렇다 할 화가가 떠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궁중기록화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1897년의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과 1879년의 〈왕세자두후평복진하도병(王世子痘候平復進賀圖屛)〉을 비롯하여, 20세기 초까지 반차도권(班次圖券)이나 대병(大屛) 형태의 궁중기록화가 대거 제작되었다. 8폭 내지 10폭의 진찬도(陳饌圖)나 연회도(宴會圖) 병풍이 주류를 이루어, 화려하고 장엄한 궁중의례의 전통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세자입학도첩〉은 후에 익종이 되는 문조세자가 명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의례과정을 서술한 화첩이고, 〈왕세자두후평복진하도병〉은 후에 순종이 되는 세자가 천연두를 회복한 기념으로 제작된 대병이다. 이들을 포함하여 19세기의 궁중기록화는 대부분 한 단계 새로워지지 못한 채 평면도식 전통을 고수한 편이다. 따라서 봉건왕조의 권위를 엿볼 수 있기는 하나, 18세기에 비해 답습에 따른 형식화 경향이 현저히 드러나 있다. 심지어 〈신관도임연회도(新官到任宴會圖)〉나 〈성균관친임강론도(成均館親任講論圖)〉 같은 사례의 느슨한 표현방식은 민화풍의 해학미마저 풍긴다.
그런 가운데 〈동궐도〉와 〈서궐도안〉, 그리고 고산자 김정호의 〈수선전도〉와 〈대동여지도〉가 19세기의 문화지형을 다시 보게 한다.
1824년에서 1830년 사이 순조 시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고증된 〈동궐도〉는 한국회화사를 통틀어 가장 큰 대작이며, 회화적 기량이 뛰어난 명품이다. 6m와 3m가 조금 못 되는 크기가 우선 압권이다. 거대한 화면에 스펙터클하게 부감한 창덕궁과 창경궁의 세세한 건물배치, 그리고 주변 산세와 숲의 꼼꼼하고 정밀한 묘사는 숨이 막힐 정도다. 사선으로 배열된 궁궐의 작도는 설계도면으로도 완벽하면서 동시에 회화성을 잃지 않고 있다. 평행사선묘(平行斜線描)의 조선식 도법이 회화적 예술미를 출중하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만약 서양식 일점투시도(一點透視圖)의 원근법으로 도면화했더라면 뒤쪽 풍경이 쪼그라져, 결코 〈동궐도〉의 장쾌한 맛을 살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구성법은 정조 시절의 〈수원능행도〉와 다산 정약용이 설계에 참여한 《화성성역의궤》 도화법(圖畵法)의 장점을 집약한 형식이다.
예를 들어 《화성성역의궤》의 〈행궁전도(行宮全圖)〉를 확대하여 제작한 것이 〈동궐도〉라고 여기면 될 것 같다. 또한 18세기 겸재와 단원에 의해 진경산수화풍이 다져졌기에, 그런 스케일의 풍경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경희궁을 담은 〈서궐도안〉과 또 다른 〈궁궐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의 문화사를 다시 써야
19세기 문화사의 또 다른 진수는 목판으로 새겨 찍은 김정호의 지도에서 찾을 수 있다. 1860년대에 완성된 〈대동여지도〉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의 근대식 지도로서, 판각 수법이나 지도의 형상 표현에 회화성이 듬뿍 담겨 있다. 전체를 펼쳐 놓으면 근대식 축척지도이면서 동시에 현대화 같은 울림을 받는다. 특히 1840년대의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지도와 회화의 조화로운 결합을 보여준다. 도성 안은 축척지도로 그리면서 그 주변의 백악·북한산·삼각산·도봉산·남산·인왕산·낙산 등은 진경산수화풍으로 새겨 넣었다. 시각적으로 현장감을 살려 낸 회화미가 가득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세 번째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 19세기의 ‘조선’이 달리 보였고 ‘19세기 문화사를 다시 써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19세기의 〈동궐도〉와 〈수선전도〉, 그리고 〈왕세자두후평복진하도병〉 등이 던져 준 감명이 진열실의 어떤 작품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전체를 망라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게다. 여기에 한 점을 덧붙이자면 앞서 언급한 〈수원능행도〉 병풍을 꼽을 수 있겠다.
흔히 18세기 문화에 대해서는 그토록 상찬하면서, 상대적으로 19세기는 폄하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는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민중항쟁, 왕조의 몰락, 식민지로의 전락 등으로 점철된 혼란의 시기였다. 미술사 측면에서도 추사 김정희와 오원 장승업 정도만을 떠올릴 뿐, 18세기에 비하여 크게 내세울 게 적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세기는 분명 봉건사회가 해체되면서 근대를 지향한 시대였다. 문화사적으로 19세기는 분명 18세기의 그 찬란한 문예의 탄력이 이어진 시기였고, 근대적 성과들이 더욱 확대된 위대한 시대여야 했다. 그렇게 볼 때, 19세기의 저력은 벽면을 가득 메운 〈궁궐도〉에 여실히 표출되었으며, 어느 영역보다 근대성을 뚜렷하게 창출한 지도가 전시실 안의 〈수선전도〉였던 것이다. 이들은 분명코 18세기에 찾아볼 수 없는 새 예술형식이고, 근대로 이행하는 역동성을 선명히 보여 준다.

또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의 궁중기록화는 비록 지배층의 소유이고 답보적이었지만, 나름대로 봉건왕조의 위세를 잃지 않고 있다. 그 형식미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치력,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재등극했던 실상과 맞물려 있다고 하겠다. 지금 형태의 경복궁 복원이라는 엄청난 역사(役事)를 완성해 낸 시기기도 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의 기록화를 지나치면서, 그 완고한 조선말기의 봉건성이 현대사회까지 이어져 지금 우리 삶과 역사의 한 코너를 규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출처  월간미술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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