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시내의 중심지는 중구이다. 물론 중구라는 명칭을 쓰는 것은 서울을 본뜬 결과이다. 서울을 따라했으면 왜 종로구는 없나 싶지만, 1963년 1월 1일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중부출장소와 종로출장소가 통합되어 중구가 되었으니 종로구가 없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도 없다. 당연히, 대구에서 가장 먼저 생긴 십자로도 중구에 있다(1909년). 경상감영공원 지나 중부경찰서 바로 앞에 있는, 지금 보면 골목 네거리 같은 교차로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왜인들의 장사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그런 시시콜콜한 유물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닐 수는 없다.
대구에는 두 개의 지하철 노선이 있다. 그러므로 대구의 중심가는 두 지하철 노선이 교차하는 반월당을 기준으로 답사를 다니는 것이 효율적이다. 제일 먼저, 반월당 역에서 내린 다음 수성구 쪽으로 땅속을 걸어 마지막 출구까지 가보자. 지하상가의 면모도 한 번쯤은 볼 만한 구경거리 아닌가. 게다가, 정신없이 구경을 하다 보면 땅속길 끝에 있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닿게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를 챙기게 된다. 학교가 볼 만해서 그리로 가는 것은 아니고, 그 학교의 옛건물 뒤, 실제로는 대도로에 붙어 있는 두 개의 기념비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두 기념비는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일제에 저항하여 그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펼친 역사를 기리는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 기념비'이고, 다른 하나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바치겠노라 선언하는 박정희 기념비이다. 그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광경을 보노라면, 대구의 정신사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대구시 홈페이지는 '(대구는 일제 시대) 민족항쟁의 본거지'이며 '(이승만 독재가 심화되던 때)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여)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다시 땅속길을 걸어 반월당 역으로 되돌아온 다음, 동부교육청 출구로 나가면 작은 오르막 위에 관덕정이 서 있다. 이 언덕의 옛날 이름은 아미산으로, 동학 교주 최제우가 처형을 당한 곳이다. 관덕정이 천주교 순교자들을 기려 세워진 건물이라 최제우와 무관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민족종교를 내세워 외세에 치열하게 저항했던 동학의 상처가 고스란히 깃든 장소라는 점에서 꼭 가볼 만한 답사지임에 틀림이 없다. 최제우가 처형당한 장소는 우리나라에서 이곳뿐 아닌가.
관덕정에서 뒤돌아 큰 도로를 건너면 이번에도 역시 보기드문 답사지가 나타난다. 대구약령시이다. 흔히 '약전골목'이라 부르는 곳인데, 우리나라 최대의 한약 거리일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한약상들이 몰려드는 국제적 명소이니 반드시 거닐어 보아야 한다. 국내 유일의, 그것도 최첨단의 현대식 체험 프로그램으로 방문객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는 한약박물관까지 건립되어 있으니, 금상첨화라는 고사성어가 실감나게 느껴진다.
이 골목을 반드시 밟아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 길의 끝자락 안에 상화고택이 있기 때문이다. 길 왼편으로 대구YMCA의 전신인 교남YMCA의 옛날 본관 건물, 오른편으로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제일교회 구관(1933년 건축)을 지나, 낡았지만 당당한 기품을 뽐내는 옛날 기와집들 사이로 들어서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 이상화가 살던 집이 있는데 어찌 가보지 않을 것인가. 상화고택은 작은 기념관으로 변신하여 쓸모 있게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고, 날마다 문화해설사가 상주하여 이곳이 '대구의 자존심'임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집이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고, 그 길이 곧 대구 사람들이 목청껏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던 '3.1운동로'의 일부이다. 약전골목에서 상화고택으로 이어지는 좁은 옛길을 아니 디딜 수 없다는 말이다.
'3.1운동로'는 상화고택 앞을 지나 계산성당 방향으로 계속 이어진다. 국가사적 290호인 계산성당을 잠깐 둘러본 다음 횡단보도를 건너, 새로 건축된 어마어마한 제일교회의 100주년 기념관 옆의 오르막 계단길을 걸으면, 땅속에서 울려나오는 만세 소리가 들린다. 그뿐인가. 이 길은 대구시가 지정한 '아름다운 길'의 대표로 뽑혀 있다. 그것은 이 길이 외형상의 아름다움도 충분히 간직하고 있을 뿐더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대구시민들의 잠재의식 속에 진득히 깃들어 있는 항쟁의 정신까지 뜨겁게 안고 있음을 감안한 결과이다.
'3.1운동로'는 동산병원 부지 내의 선교사 주택 단지 사이를 통과하여 계성학교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선교사 주택들을 보노라면, 이 길이 비록 3.1운동로가 아닐지라도 보는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는 멋진 길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선교사 주택 앞에는 박태준의 노래비도 있다.
3.1운동로는 계성학교로 이어진다. 그 학교 지하실에서 대구 경북 지역에 배포된 독립선언문이 인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대구의 3.1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계성학교와 서문시장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그런즉, 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서문시장 장날에 맞춰 거사를 벌인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대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운집하는 때와 장소가 전국적 거대시장인 서문시장의 장날인 까닭이다.
계성고등학교 교무실인 아담스관은 친일파 박중양이 부순 대구읍성의 성돌을 주워와 적벽돌과 함께 쌓아 지은 고풍스러운 건축물이다(1908년).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2층 건물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전라도에서까지 사람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집 위에 또 집이 있다'면서 구경을 왔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군인들의 숙소로 징집되었고, 2군사령부도 이 학교 운동장에서 창설되었다. 이래저래 계성학교는 가볼 만한 답사지인 셈이다.
계성학교를 나왔을 때쯤 시장기가 느껴진다면 학교 정문 바로 옆에서부터 시작되는 서문시장에 들러 간단한 요기를 하는 것도 좋다. 특히 국수 등을 파는 노점 형식의 식당들이 줄을 지어 늘어선 정경은 백화점과 아웃렛만 드나드는 데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에게 꼭 보여줄 만한 구경거리이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나면, 세상에는 부자들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장 안을 오가는 사람들처럼 서민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독립만세를 부르거나 지금도 병역 의무를 실천하는 군중의 대부분이 이런 서민들이라는 사실까지도.
서문시장을 관통하여 조금만 더 나아가면 달성공원에 닿는다. 달성은 옛날 토성 쌓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국가사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인 상화시비도 있고, 조금 전에 지나온 관덕정에서 처형된 최제우 동학교주의 동상도 있다. 호랑이도 있고, 햇살을 받으며 한가한 시간을 떼우는 노인들도 많다. 이등방문과 순종이 이곳을 함께 방문하여 기념식수를 했다는 기록에 따라 '순종나무'로 추정되는 향나무도 있으니 유념하여 찾아보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다. 아직 어느 나무가 바로 그 순종나무인지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해 안내판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이 나무야! 아니, 저 나무 같아!'하며 자녀와 함께 정신을 집중해보는 것은 아주 교육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순종나무 이야기는 언제 하는 것이 좋을까. 달성공원에 들어가면서 미리 해두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부터 시작하여 둥그렇게 관람을 하도록 권장되는데, 먼저 원숭이 등이 있는 동물원 일대가 나오고, 최제우 동상, 곰, 호랑이에 이어 상화시비를 보게 되고, 끝으로 코끼리와 놀다가 이윽고 공원 한복판으로 내려왔을 때 그곳에서 두 그루의 오래된 향나무와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두 그루 향나무가 순종나무로 추정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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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달성공원의 향나무. 나란히 선 다른 그루는 이등박문이 심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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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중구 일원을 두루 답사했다. 경상감영공원과 대구향교가 빠졌고, 향교 인근 제일중학교 교정에 있는 거북바위가 빠졌다. 그러나 그들은 대구 아닌 다른 곳에도 다 있다. 다만 대구가 내놓고 자랑할 만한 정신적 유산- 국채보상운동의 유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중구 최고의 안타까움이다. 중구 복판에 국채보상공원을 만들고 비석도 세웠지만 세월의 무게가 없으니 사람을 유인하는 데 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중구 답사는 우리에게 기록과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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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공원의 밤 풍경 애써 국채보상공원을 조성하고 조경과 빛깔을 보탰지만, 현대적 아름다움은 있을지 몰라도 역사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공원에서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잠깐이나마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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