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이후 겨우 유지해가던 사업을 접고 삼성 휴대폰 소프트웨어개발 업체에서 일할 때였다. 회사서 금오산 등반을 갔는데 숨이 턱밑까지 차 동료들을 따라잡기도 힘들었다. 저질체력으로 세상 살아가기 힘들 것 같아 주말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용지봉을 찾기 시작했다. 어느 봄날 산을 내려오다 잠시 나무 밑에 앉아 쉰 적이 있다. 앉아있다 그대로 뒤로 누웠다. 옆에서 향기가 나 고개를 돌리니 하얀 꽃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잎아래 너무나 귀여운 작은 꽃들이 조롱조롱 달려 있었다. 누워야 보이는 꽃들도 있구나 하며 한참을 보다 가벼운 발길로 산을 내려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난을 좋아하는 한 친구가 KBS방송국에서 하는 야생화 전시회를 보러가자고 했다. 흔쾌히 따라나섰는데 아주 볼 만 했다. 마지막 코너를 도는데 얼마 전 용지봉에 만난 그 하얀 꽃이 전시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 꽃은 눕지 않아도 잘 보였다. 이름까지도 예뻤다. 은방울꽃!. 꽃에 딱 맞는 이름이었다. 내가 처음 알게 된 야생화 이름이다.
그때부터 산에 가면 꽃들이 눈에 들어 왔다. 사진을 찍어 내려와 인터넷을 뒤지면 이름이 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산을 오른 그 꽃 이름을 아는 다른 이가 사진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이름을 알아갔다. 그 무렵 친구들과 용지봉을 오르다 어떤 바위 위에서 쉬는데 그 주위에 하얀 꽃들이 수북히 떨어져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한 나무에 하얀꽃이 많이도 매달려 있었다. 내려와 찾아보니 ‘때죽나무’였다. 이렇게 또 하나 꽃이름을 알았다.
그러다 또 다른 친구들과 설악산을 간 적이 있다. 때죽나무 꽃들이 보였다. 난 친구들에게 이게 때죽나무라고 아는 척을 하는데 옆에 있던 산객이 ‘이건 때죽나무가 아니고 쪽동백입니다’ 했다. 꽃은 정말 닮았는데 잎이 둥글고, 꽃이 매달린 형태가 달랐다. 이렇게 또 하나 배우게 되었다.
대구서는 용지봉, 서울에서는 관악산을 주로 다니다 보니 꽤 많은 꽃 이름을 알게 되았다. 얼마 전 제주도에 여행 간 친구가 어느 화단에 핀 꽃을 몇장 찍어 보내 나에게 이름을 물어왔다. 그 친구에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용지봉, 관악산, 검무산에 피는 꽃 이름만 아니더. 첨보는 사람 이름을 모르 듯 첨보는 제주 꽃 이름은 모르니더. 꽃도 사람과 같아여. 첨 만나면 눈인사만 하고, 또 보면 이름 알고, 자꾸 만나 부르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름 익히는거니더.’라고.
요즘 산을 자주 못 가 이름을 하나씩 잊어버리고 산다. 지난주 대구서 오랜만에 친구 둘과 술 한잔했다. 경북대 생물학과 교수인 친구가 머지않아 DNA를 분석해 바로 식물이름을 알려주는 휴대용 기계가 나올 거라고 했다. 볼 때마다 헷갈리는 꽃들, 알 듯 말 듯 이름이 바로 생각나지 않는 꽃들을 만나면 새로운 디지털 기기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난 아직은 아나로그 감성이 좋다.
출처 : 야생화 세계로 안내한 은방울꽃 < 박효삼 강산들 이야기 < 여행속으로 자연속으로 < 연재 < 기사본문 - 한겨레:온 (han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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