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달구벌과 대구

대구 중앙통

思美 2008. 1. 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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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驛前通으로 시작한 중앙통.(정식 명칭은 중앙로이나 대구시민들에겐 아직도 중앙통으로 통용됨)

대구 남북을 잇는 중요한 도로입니다.

대구역 지하도가 만들어지면서 북으로는 경북도청까지, 남으로는 앞산(영대병원네거리)까지 연장이 되었죠.

 

일제시대 차는 한대도 안 보이네요.

 

대구역에서 바라 본 중앙통.

 

 

 

저 멀리 중앙통 끝에 대구역이 보이네요.

 

 

 

 

건너편에 "기독교청년회관"이란 간판으로 보아 YMCA앞인 것 같네요.

 

트럭이 서있는 곳이 상업은행인 듯.

 

 

1930년경 북성로 입구.

 

칠성사이다간판밑에 멸공통일이 보입니다.

이 건물 얼마전에 없어져서 파티가 들어섰죠.

 

 1970년. 아카데미극장 부근.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제18화]


일제하 대구의 번화가


일제하 대구의 상권은 몇몇 외형이 영세한 분야를 제외하곤 거의 일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몇몇 분야라면 대구 신정(新町. 대신동)에 위치한 ‘큰 장’(서문시장)의 건어물, 유기, 옹기, 사기 외에, 광목, 모시 등 재래직포 따위였다. 또 남성정 약전골목의 한약제 상권과, 전래의 탁주(막걸리)양조업, 정미업과 중소규모 양곡매매업, 걸음마단계의 소규모 직조업, 그리고 고된 노동력을 원천으로 한 채소 과일의 생산과 판매, 정육업 등에서 일인들과 힘겨운 경쟁을 하거나 겨우 따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신분과 직업차별의 대표적 사례였던 정육판매업은 30년대까지만 해도 백정(白丁)들의 전문 업종이었다. 이 무렵 경상도의 푸줏간에선 어른 아이 없이 “고기 주게”하며 반말로 주문하는 악습이 예사였다. 도서출판 ‘현암사’의 고 조상원(趙相元)회장은 “사람차별하면 못 쓴다”는 부친의 영향으로, 푸줏간 심부름 때면 꼭 “소고기 한 근 주이소”했더니, 그의 경어에 감격한 백정주인이 쇠고기를 덤으로 듬뿍 주더라는 일화를 남긴 바 있다.



의식주와 관련된 1. 2차 산업뿐만 아니라, 이들의 가공, 유통, 판매, 운수, 그리고 건설, 서비스사업 중, 규모가 큰 사업은 1940년도 말 현재 250여만 명인 경북인구의 겨우 2%인 일인들의 독무대이다시피 되어 있었다. 자본력과 정보력의 우위 탓도 있었지만 상업을 천시했던 우리네보다 실리를 우선한 그들의 몸에 베인 상인정신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대구의 번화가는 거의 일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일제 때 대구 제일의 번화가는 지금의 북성로인 모도마찌(元町)와, 지금의 서문로인 혼마찌(本町)였다. 모도마찌는 대구역이 개설되면서 대구성내에서 제일 가까운 역세권으로 발전했다. 일인들은 본시 북향집을 선호한 까닭에 같은 모도마찌라도 북향 쪽 상가가 더 목이 좋은 편에 속했다. 미나까이백화점과 야나기야(柳屋)무역상회, 해방 무렵의 천우당(天佑堂)백화점, 일광(日光)상회 잡화부도 모두 북향점포였다. 이들 북향상가는 식당과 주점 등으로 밤거리가 요란한 지금의 향촌동인 무라까미초(村上町)와 잇닿아 있어, 남향상가보다는 한결 땅값이 비쌌다.

혼마찌에는 대구경찰서와 경상합동은행(구 조흥은행 대구지점), 한성은행 대구지점(구 조흥은행 대구서지점), 대구서부금융조합(구 영남일보사옥), 그리고 일본인 학교인 아사히(旭)소학교(구 종로초등학교)가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혼마찌 끝과 닿아있는 우에마찌(上町. 포정동)에는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산업은행 대구지점)과 대구우체국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과 지척의 거리에는 대구관가의 중심이라 할 경상북도도청(경상감영공원)이 있었고, 그 입구에는 대구에서 가장 서슬 푸른 헌병대(구 경북병무청)가 있었다.

여기서 동으로 200여 미터 이어진 거리엔 조선은행 대구지점(구 한국은행 대구지점)이 있었고, 혼마찌의 서쪽인 이찌바초(市場町. 동산동)삼거리엔 경일은행(구 상은대구서지점)이 자리 잡았다. 조금 서진하면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서문시장이었다. 결국 대구의 일인들은 관공서와 은행, 학교와 시장이 이어져, 행인과 돈거래가 붐비는 노른자위 터를 차지해 조선인을 압도하는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대구역 광장에서 남으로 곧게 뻗어나간, 대구에서 제일 넓은 12간(약 22m)도로인 중앙통은 대구의 중심도로였다. 그러나 일제 때나 해방직후에도 한동안 자동차보다 우마차, 손수레의 통행량이 더 많았다. 경북금융조합연합회(구 농협도지부)와 달성금융조합(농협달성군조합)등 금융기관도 있었지만 여관과 식당, 잡화점 등이 많은 비교적 한적한 거리였다.

- 정영진의 '대구이야기'(매일신문/2006년 5월 1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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