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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시디자인 탐사](8)대구의 역사와 도시이미지 | |||||||||
입력: 2007년 10월 25일 17:31:05 | |||||||||
“대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요?” 얼마 전 대구에 갔다가 차 안에서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방송 얘기다. 한 라디오 방송국이 대구 시민들에게 조사한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들이 나왔다. “사과, 섬유산업, 대구월드컵경기장, 박정희 대통령….” 여기서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대구는 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보수적 성향의 도시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답 중 역사문화적인 이미지도 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시민의식 실태조사를 위해 실시한 ‘대구시 이미지 조사(2003)’에서 한가지 단서를 발견했다. 이 조사에서 ‘역사문화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대구시민들에게 물었는데 그 결과가 의외였다. 예컨대 ‘대구에는 역사문화적 정체성이 있는 편이다’라는 응답이 20%인데 반해, ‘정체성이 없다’는 대답은 39.5%였다. 무려 2배 정도의 부정적인 답이 나온 것이다. 대구는 5000년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역사문화적 정체성이 강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다. 도대체 왜 그럴까? 역사문화적 정체성이 부재하다는 것은 삶에 대한 자의식이 부재하다는 말일 수 있다. 이런 이미지와 시민의식을 형성한 공간적 배경인 대구란 도시가 궁금해진다. -소통잊은 달구벌, ‘짝퉁 금관’을 벗어라- #도시 이미지의 내적 요인
최근 대구는 첨단 미래형 도시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과거 대구는 구미, 포항, 창원, 울산 등 주변 산업도시들의 중심에 위치한 물류 및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해 왔다. 또한 기계금속, 섬유 패션 등 기간산업과 전시컨벤션, 교육 및 의료, 비즈니스 서비스 산업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대구가 앞으로 모바일 디스플레이, 기능성 바이오산업 등 첨단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혁신도시화하는 미래 비전과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한데 이런 장밋빛 비전과 달리 외지인들에게 대구의 도시 이미지는 어둡기만 하다.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을 비롯해 빈번히 발생하는 대형 참사와 각종 사고의 진원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구는 전국에서 가장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며 소통이 힘든 배타적 집단이기주의 성향의 도시로 인식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대구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된 곳이자, 해방 후 2·28 학생운동과 같은 민주화운동의 발상지였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이처럼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된 원인으로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의 지적이 눈길을 끈다. 그는 대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형성의 직접적인 원인은 소위 ‘TK 정서’라는 말이 함의하듯 정치적인 문제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즉 5·16 이후 수십년 간 소수의 정치군인들이 대구(경북)를 지역적 기반으로 대구 사람들을 인적토대로 활용해 적지 않은 특혜를 누린 데 있다는 것이다. 특히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을 희생양으로 삼아 등장한 5공 정권의 각종 지역 차별적 행태가 대구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흐려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구의 미래를 위해서 외형적인 혁신도시화 못지않게 그동안 부정적으로 각인된 사회문화적 기질 및 성향과 같은 내재적 요인들을 치유하고 개선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도시 이미지란 단순히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요소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암묵적 분위기’를 포함하는 사회문화적 요소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삶과 관계한다. 따라서 필자는 대구의 역사문화적 맥락을 추적해 도시 이미지를 치유하는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도시경관과 풍경 대구의 도시경관에 대한 인상은 18세기 인문지리학자 청담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 속에 잘 담겨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구는 감사가 있는 곳이다. 산이 사방을 높게 막아 복판에 큰 들을 감추었으며, 들 복판에는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 하류에 합친다. 고을 관아는 낙동강 뒤쪽에 있다. 경상도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거리가 매우 고르니, 또한 지형이 훌륭한 도회지이다.” 실제로 두류공원에 있는 대구타워 전망대에 오르면 청담 선생의 옛말이 실감나게 들어온다.
사방으로 탁 트인 대구의 경관은 이 지역의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지형적 특성과 맞물려 있음을 잘 말해준다. 곳곳에 구릉이 존재하나 건물들 속에 묻혀 대체로 평평한 지형을 이루는 탓에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에 팔공산, 서쪽에 와룡산, 동쪽에 환성산, 남쪽에 앞산과 비슬산에 둘러싸인 드넓은 분지에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분지를 가로질러 낙동강으로 향해 흐르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이 흐르고 있다. 이로써 대구는 취락형성은 물론 육로와 수로를 통해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도시형성의 타고난 장점을 지녔다. 조선시대 고지도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여지도’에는 남쪽에 연구정(連龜亭)이 있는 작은 산과 북쪽의 금호강과 동쪽 신천 사이에 4대문을 갖춘 대구읍성이 등장한다. 이 지도에는 대구분지 내에 크고 작은 여러 구릉들과 많은 사찰들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에서 대구제일여중이 위치한 연구산(連龜山·현 수도산) 일대는 옛 대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연구산을 “부의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이다”고 했다. 연구산은 ‘해동지도’나 ‘광여도’ 등의 고지도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처럼 대구는 산, 강, 구릉을 포함한 분지로 일찍이 취락과 읍성을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분지지형은 한국에서 기온의 연교차가 가장 높은 내륙성 기후를 형성해 대구인의 성격과 기질 형성에 한몫을 했다고 한다. ‘달구벌의 맥’에 따르면, 혹서엄한(酷暑嚴寒)의 극단적 기후환경이 주민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쳐, 보수적인 대구인의 기질에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대구는 중앙집권적인 옛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부산, 인천, 대전, 광주 등 대부분 광역대도시들은 시청사를 이전하는 등 다핵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반면에 대구는 단핵집중형의 옛 도시공간구조를 고수한다. 따라서 도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중구에 형성되어 있다. 포정동 경상감영의 대구도호부에서 현재 대구광역시 사무용 고층건물, 주상복합 건물 등에 이르는 이곳에 중첩된 오랜 시간의 켜는 원활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불연속적 풍경을 자아낸다. 또한 시가지 외곽에는 도심부와 무관하게 세워진 대규모 아파트 주거단지들이 펼쳐진다. 사람뿐만 아니라 공간 사이에서도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특히 동쪽의 신천 너머 수성구 일대의 ‘롯데캐슬’ 등 초고층 아파트단지들은 파시스트적인 위압감을 자아낸다. 중구 일대 도심은 마치 자연발생적인 시가지 위로 솟아오른 섬과 같은 모습으로 비쳐진다. 한데 그 서쪽으로 진짜 섬과 같은 또 다른 섬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달성공원이다. 이는 서기 261년 신라 첨해왕(沾解王) 때 쌓았다는 달벌성(達伐城)에서 유래한 고대국가 시절 대구의 원형인 셈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대구타워에서 두개의 점처럼 존재하는 달성공원과 중구 일대를 연결하는 선을 그어 보았다. 이는 대구분지의 구릉에 터 잡은 최초의 부족국가 달구벌에서부터 조선시대 대구읍성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적 축을 의미한다. #달구벌과 짝퉁 금관
고대국가 달구벌의 존재는 달성 일대의 수많은 고분군으로 확인된다. 달성에서부터 서쪽 와룡산 방면으로 이어지는 구릉에는 많은 고분들이 있는데, 특히 달성 남서쪽 구릉의 비산동 고분에서는 수많은 부장품과 함께 높이 30.9㎝와 23.3㎝의 청동에 금박을 입힌 두개의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현재 황금동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금동관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황남대총과 금관총 등에서 나온 출자형(出字形) 금관과 재질만 다를 뿐 형태는 똑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금동관의 주인은 지역 최고권력자 중의 한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학자 김현숙 교수에 따르면 이 금동관의 의미는 신라의 신하로서 복속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달구벌의 짝퉁 금관은 신라왕의 신하로서 허용된 범위 안에서의 특권만 행사할 뿐 독립은 허용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최고권력자로서 권위의 상징이자, 독립국가를 이룰 수 없는 좌절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깝게도 이 짝퉁 금관의 역사가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달구벌의 후예들 중에는 지난 수십년 동안 TK 인맥의 특혜를 누려왔으면서도 늘 배타적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국민을 선동하는 이들이 있다. 최근에는 `빼앗긴 10년'을 운운하기도 한다. 온갖 기득권을 다 쥐고 있으면서도 `권력의 좌절'을 외치는 이런 열등의식으로 진짜 금관을 차지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대구의 도시 이미지를 계속 악화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나는 디자인을 ‘삶의 약속’이자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믿고 있다. 도시 디자인을 위해서는 삶에 대한 철학과 그릇에 담겨질 마음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그것은 전통과 혁신 사이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첨예한 마음, 나눔과 베풂의 마음, 사리분별의 마음, 진솔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도시 디자인이라는 큰 그릇에 담겨질 때, 비로소 도시는 일상에서 함께 호흡하고 교감하는 생명체가 된다. 따라서 앞으로 대구의 진정한 도시 디자인을 위해서는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요소뿐 아니라 그동안 대구가 조장하고 방관했던 삶의 방식으로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정신적 ‘치유’가 절실한 것이다. 〈김민수|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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