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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어머니를 졸라서 달성공원에 나들이를 간 적이 있습니다. 교동시장에 살았었는데 어머니께서는 맛난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삼형제 손을 잡고 달성공원까지 걸어 갔었습니다. 공원에 도착해서는 다리가 아파 잘 놀지도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대구시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는 달성공원의 유래입니다.
사적 제 62호 |
대구는 신라때 달구화현(達句火縣)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742∼765재위)때에 이르러 비로소 대구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의 옛이름은 이 달구화(達句火) 달불성 (達弗城)에서 유래된 것이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月城)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城廓)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아래층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木柵)의 흔적도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발달사상 가장 이른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점해왕(沾解王)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 합병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 후 고려 공양왕 2년(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조선조 선조29년 (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
일제시대 대구신사가 세워졌던 달성공원.
관 풍 루
- 1975.2.5지방문화재 자료 제3호 지정
- 목조와가 2층 (정면3칸,측면2칸)
- 1596년(선조29년) 경상감영설치
- 1597(선조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
- 1601년(선조34년) 경상감영 정문 (현 경상감영공원 건립)
- 1906년 대구읍성 철거시 달성공원으로 이전
달성공원 정문
이상화 시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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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헌장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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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하는(아니 하품하는) 벵갈호랑이
달성공원 정문 우측 인동촌시장가는 당설공원 담장옆 연탄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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