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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동성로 터줏대감 인제약국 주인이 본 '동성로 50년' 매일신문

思美 2008. 4. 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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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동성로 터줏대감 인제약국 주인이 본 '동성로 50년'
# 인제약국,
인제 문닫습니다
대구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혹은 잠시 대구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게 “당신은 대구에서 어떤 곳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여러 장소들이 언급되겠지만 아마도 1등은 ‘동성로’가 아닐까 싶다. 하루 유동인구가 수십만명에 이르는 동성로는 대구의 여러 거리 중 하나로 재단하기엔 그 존재가 너무나 크고, 묵직하다. 동성로는 대구 사람들의 삶과 땀, 문화와 추억 등이 오롯이 녹아든 ‘보물과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동성로에서도 대구백화점 앞은 ‘고갱이(사물의 핵심)’에 해당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대구백화점 맞은 편의 ‘인제약국’을 50년동안 지킨 약사 김숙자(76`여)씨는 말 그대로 동성로의 터줏대감. 다음달에 약국 문을 닫는 그녀로부터 동성로 50년사를 들어봤다.

# 마음 속 버드나무 20여년전 먼저 떠나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김씨가 동성로에 약국 문을 연 것은 1959년 8월15일. “인술제민(仁術濟民:인술로 백성을 구한다)에서 약국의 이름을 따왔지요. 약국을 처음 연 날이 마침 광복절이어서 개업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요.” 50년에서 몇개월 빠지는 긴 세월에 걸쳐 약국을 지키며, 동성로와 애환을 함께 해왔다.

노벨상을 받은 퀴리부인과 같은 학자가 되기 위해 약대를 간 김씨는 처음에는 중앙통(지금의 중앙로)에 약국을 차리려 했다. 그러나 돈이 조금 모자라 당시에는 한적했던(?) 동성로에 약국을 연 것. 인제약국이 들어선 일본식 2층 건물 1층에는 일제시대부터 야마도 약방이 자리잡고 있었다.
“돌 무렵 약국 이곳저곳을 기어다니던 아들(대학 교수)이 벌써 쉰한살이 됐어요. 저에게 이 약국과 동성로는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소중한 곳입니다.” 약국 뒷편에 있는 집을 구해 살던 김씨는 고 김준성 경제부총리 가족과 가깝게 지냈다.

“그 때 경제인이던 김 부총리는 기계 두대로 양말을 만들었지요. 그분 가족과 한가족처럼 친하게 지냈어요.”
휴일도 없이 1년 365일, 약국을 지키던 김씨에게 ‘친구와 같은 존재’는 대구백화점 남쪽에 있던 한그루 버드나무였다. “그 버드나무를 보고 춘하추동이 바뀌는 것을 알았어요. 앙상한 가지만 있던 버드나무에 봄이 되면 연두빛 새싹이 나고, 여름이면 잎이 우거지는 것을 보고 세월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1980년 무렵 그 버드나무가 잘렸을 때엔, 소중한 친구를 잃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낭만과 정이 흐르는 거리, 동성로!
1970년쯤 대구백화점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서면서 인제약국 주변도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씨가 약국을 열 무렵엔 이웃집을 비롯해 초가집이 많았지만 하나둘 신식 건물로 바뀌었다. “60~70년대만 해도 이 주변엔 가정집이 많았어요. 집값, 방값이 싸다보니 세를 얻어 사는 사람이 적잖았지요.” 오후 4시 무렵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나가는 여인들은 술집종업원, 5시 무렵에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 나가는 여인들은 댄서였다는 게 김씨의 얘기다.

이 무렵 김씨의 약국은 ‘동성로의 사랑방’역할도 했다. “고부갈등이나 부부문제로 고민을 하던 여성들이 자주 찾아왔지요. 바람 피우다 부인에게 들켜 어떻게 할까 물어오던 남성도 기억이 나는군요.” 인제약국은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소, 김씨는 충실한 카운셀러 역할을 했던 셈. 어려운 시절, 김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여성 가운데 일부는 요즘에도 찾아와 인생 얘기로 꽃을 피우고 있다.

대구백화점이 들어선 70년대 이후 대백 앞 동성로는 멋과 낭만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향촌동이나 교동 부근에 있던 상권도 점차 남진해 대백 앞이 상권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옷이나 신발을 사면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을 거닐며, 다른 사람들에게 맵씨를 자랑하는 게 하나의 불문율이 됐다.

“크리스마스 이브나 한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엔 동성로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70년대엔 크리스마스 이브나 한해의 마지막 날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됐지요. 그 날밤엔 동성로는 사람의 물결로 넘쳤어요. 저도 남편과 친구 부부들과 함께 동성로를 거닐다 인파에 휩쓸려 서로를 잃어버린 적도 있었어요.”

김씨는 동성로 대백 앞을 경상도 사투리를 동원, ‘뻘쭉다방’이라고 표현했다. “시내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백 앞에서 만나자’는 말이 관용어가 될 정도로 대백 앞은 만남의 광장 역할을 톡톡히 했어요.”

#데모, 사과탄 그리고…
동성로 대백 앞은 역사가 소용돌이 쳤던 곳이기도 하다. 김씨는 60년 2`28운동부터 61년 5`16, 60년대 한일회담 반대 시위, 70년대 유신독재 투쟁, 80년대의 민주화 시위와 6`10 항쟁 등 대백 앞에서 벌어졌던 수 많은 데모와 시위를 지켜봤던 산증인이다.

“사과탄을 맞은 데모대와 시민들이 제 약국 안으로 피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약국이 피난처 역할을 했어요. 최루탄 때문에 눈물, 콧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세수를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물을 나눠준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백 앞에서 워낙 데모가 많다보니 오전에만 약국을 열고, 오후에는 아예 문을 닫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세태 변화에 따라 인제약국에서 파는 약도 달라졌다. “50~60년대에는 결핵약을 찾는 사람이 많았어요. 요즘에는 콘택트렌즈를 많이 사용하다보니 렌즈관련 약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요.” 변함없이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은 감기약과 소화제다. 약을 잘 짓는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멀리 달성이나 현풍`고령`반야월 등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었다. “약을 먹고 병이 나았다면서 감자나 고구마`마늘`고추 등을 싸오는 손님들도 있었지요. 영천에서 온 한 손님은 아들의 병을 고쳐줘 고맙다며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데리고 와 인사를 시킨 적도 있어요.”

약국을 찾는 손님들의 변화도 흥미롭다. “예전에는 4,5명이 함께 와 드링크를 마실 경우 한 친구가 돈을 다 내는 경우가 흔했지요. 요즘에는 각자 계산하는 것은 물론 돈없는 친구가 하나 사달라고 해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남자가 거의 계산을 한 반면 요즘에는 여자가 계산하는 경우가 많아 여성의 위상 변화를 실감한다는 게 김씨의 귀띔이다.

#정이 넘치는 거리로 남기를```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김씨는 “건강을 위해 아무 것도 안한다. 그저 쉬지 않고 일하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했다.

미국이나 일본의 여러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는 김씨는 동성로도 대구다운 특징을 가진 거리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한 거리는 하늘문이 열리고 구름이 그려져 있어 보기가 좋더군요. 또 일본의 거리에는 간판이 잘 정리돼 깔끔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동성로도 아름다운 거리, 낭만이 넘치는 거리, 그리고 시민들에게 휴식을 주는 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반세기를 해온 약국의 문을 닫으려니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지만 50년을 한자리에서 손님들과 함께 해왔다는 사실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인제약국 자리는 세를 놓기로 했다. “은퇴 후에는 당분간 푹 쉴 생각입니다. 그러나 제 인생이 녹아든 동성로에 대한 애정은 계속 간직해야지요. 옛날 동성로는 이웃간 서로 음식을 나눠먹고, 정을 나누던 그런 곳이었어요. 앞으로도 동성로가 정이 흐르는 거리, 사람 냄새가 나는 거리로 계속 남아주기를 바랍니다.”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작성일: 2008년 0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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