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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그때 그시절] 50∼60전 대구 '빛바랜 기억들' -영남일보 2009/11/06-

思美 2010. 4. 17.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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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그때 그시절] 50∼60전 대구 '빛바랜 기억들'

 

 

  

))) 비산 지하도 뚫리기 전 50년대 증기기관차 풍경((( 1950년대 어느 날 증기기관차가 지나가는 광경이다. 북비산 네거리에서 불과 100여m 북쪽에 있는 비산 지하도가 뚫리기 전의 일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별표국수 공장이고, 이때는 건널목 간수가 없어 말발굽이 철로에 끼여 말이 열차에 치여 죽는 등 크고작은 사고가 빈발했다.
))) 비산 지하도 뚫리기 전 50년대 증기기관차 풍경((( 1950년대 어느 날 증기기관차가 지나가는 광경이다. 북비산 네거리에서 불과 100여m 북쪽에 있는 비산 지하도가 뚫리기 전의 일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별표국수 공장이고, 이때는 건널목 간수가 없어 말발굽이 철로에 끼여 말이 열차에 치여 죽는 등 크고작은 사고가 빈발했다.
))) 70년대초 대구…넝마주이 소년((( 1970년대초만 해도 대구 지역 곳곳에는 넝마주이나 아침에 밥을 얻어 먹으러 다니는 거지, 허잡스러운 물품을 팔러다니는 상이군경 등이 많았다. 블록 담장에 지친 몸을 기댄 채 해바라기를 하며 생모를 생각하는 듯 어린 넝마주이의 표정이 더없이 서럽기만 하다.2
))) 70년대초 대구…넝마주이 소년((( 1970년대초만 해도 대구 지역 곳곳에는 넝마주이나 아침에 밥을 얻어 먹으러 다니는 거지, 허잡스러운 물품을 팔러다니는 상이군경 등이 많았다. 블록 담장에 지친 몸을 기댄 채 해바라기를 하며 생모를 생각하는 듯 어린 넝마주이의 표정이 더없이 서럽기만 하다.
))) 60년대 대구 물장수 아저씨((( 60년대만 해도 대구의 상수도 보급률은 형편 없었다. 변두리 달동네 주민들은 매일 공동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거나 매일 동네를 방문하는 물장수 아저씨한테 물을 사먹어야만 했다. 이때는 드럼통이 급수통으로 이용됐다.3
))) 60년대 대구 물장수 아저씨((( 60년대만 해도 대구의 상수도 보급률은 형편 없었다. 변두리 달동네 주민들은 매일 공동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거나 매일 동네를 방문하는 물장수 아저씨한테 물을 사먹어야만 했다. 이때는 드럼통이 급수통으로 이용됐다.
))) 60년대 개구쟁이들의 신천나들이((( 60년대 동구 신천동 푸른다리 근처 징검다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한 아이(왼쪽에서 네번 째)가 갓난애기를 등에 업고 돌보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낸다.4
))) 60년대 개구쟁이들의 신천나들이((( 60년대 동구 신천동 푸른다리 근처 징검다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한 아이(왼쪽에서 네번 째)가 갓난애기를 등에 업고 돌보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낸다.
))) 구름과자를 아시나요?((( 반세기 전만 해도 '국민학교' 앞은 불량 군것질거리의 집산지였다. 특히 뜨겁게 달궈진 철통 안에 설탕을 집어넣으면 금세 양철통에서 구름이 피어올랐다. '구름과자'로 인기가 높았던 솜사탕 제조기는 척박한 일상을 살던 아이들에겐 꿈결 같은 것이었다.5
))) 구름과자를 아시나요?((( 반세기 전만 해도 '국민학교' 앞은 불량 군것질거리의 집산지였다. 특히 뜨겁게 달궈진 철통 안에 설탕을 집어넣으면 금세 양철통에서 구름이 피어올랐다. '구름과자'로 인기가 높았던 솜사탕 제조기는 척박한 일상을 살던 아이들에겐 꿈결 같은 것이었다.
))) 엄마 제가 이 잡아 드릴께요((( 공중위생 시스템이 전무했던 60년대에는 이와 벼룩, 빈대가 주민들의 몸 곳곳에 기생했다. 볕이 좋은 날 동구 신천동 푸른다리 근처 판잣집 앞에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이를 잡아주고 있는 딸의 눈매가 더없이 훈훈하기만 하다.6
))) 엄마 제가 이 잡아 드릴께요((( 공중위생 시스템이 전무했던 60년대에는 이와 벼룩, 빈대가 주민들의 몸 곳곳에 기생했다. 볕이 좋은 날 동구 신천동 푸른다리 근처 판잣집 앞에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이를 잡아주고 있는 딸의 눈매가 더없이 훈훈하기만 하다.
))) 50년전 주막((( 50여년전 북구 팔달교 동쪽 끝은 모래언덕이었다. 하지만 매년 장마철 상습침수 구역이라 집을 지을 때 1m 정도 높게 계단처럼 돋웠다. 사진속 초가집은 주막으로 칠곡 방면에서 시내쪽으로 오던 행인들이 잠시 쉬며 막걸리를 마시던 곳이었다.7
))) 50년전 주막((( 50여년전 북구 팔달교 동쪽 끝은 모래언덕이었다. 하지만 매년 장마철 상습침수 구역이라 집을 지을 때 1m 정도 높게 계단처럼 돋웠다. 사진속 초가집은 주막으로 칠곡 방면에서 시내쪽으로 오던 행인들이 잠시 쉬며 막걸리를 마시던 곳이었다.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 '준공 직전의 경북도청'((( 준공 직전 공사 중인 경북 도청 창문 턱에 올라가 손을 잡고 놀고 있는 동네 개구쟁이들. 도청은 옛 중앙공원 자리에서 1966년 4월1일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8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 '준공 직전의 경북도청'((( 준공 직전 공사 중인 경북 도청 창문 턱에 올라가 손을 잡고 놀고 있는 동네 개구쟁이들. 도청은 옛 중앙공원 자리에서 1966년 4월1일 현재 자리로 이전했다.
빛바랜 사진 한 장.

꼭 시간을 멈추게 하는 '흡착포' 같다. 세월은 가도 사진 속 세월은 고정돼 있다. 훌쩍 늙어버린 한 노인의 동공에 비친, 고추를 내놓고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 현실은 팍팍하지만 사진 속에서의 시간만은 한없이 평화롭고 푸들푸들거린다. 그 시절 시골 토방 벽 한 켠에 걸려있던 한 집안의 일대기가 오롯하게 새겨진 파리똥 앉은 가족 사진 액자. 한 가문의 '블랙홀'임에 분명하다. 어느 날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요절해버린 자식의 '부재'(不在)도 사진 한 장이면 '현존'(現存)의 실상으로 엄존한다. 부모는 손바닥으로 종일 몇십번씩 그 사진을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이제는 떠나가버린 연인과 황홀했던 밀애의 시간, 비록 지금 내 손에 그 추억을 잡을 순 없지만 무심코 책 갈피에서 발견한 수 십 년 전 연인의 사진 앞에서 빙그레 웃음을 피우는 게 '먼 사진'의 위력이 아닌가. 현존과 그 사진의 틈이 멀먼 멀수록 그 감동과 애틋함은 더해진다.

한 도시의 과거 표정은 늘 무참히 지워진다. 그 누구도 '실물지수'로 복원시킬 수 없지만 빛바랜 사진 한 장만은 능히 그 일을 할 수 있다. 한 세기, 아니 반세기 전 사진도 이젠 '문화재급'. 그 흔한 고교시절 사진 한 장도 찾아보면 보이지 않는다.

이번주부터 원로 향토사진가 앙산 장원식의 제4사진집(징심유관)에서 사금처럼 골라낸 50~60년전 추억의 대구 사진들을 지상중계한다.

사진= 사진작가 장원식씨 제공

 

  • 글=이춘호기자  =진=박진관기자 
  • 2009-11-06 07:40:42  

옛 도청부터 신천 넝마주이까지 대구 '빛바랜 기억들' 옛 도청부터 신천 넝마주이까지 대구 '빛바랜 기억들' 옛 도청부터 신천 넝마주이까지 대구 '빛바랜 기억들'

)))앙산 장원식은

1931년 대구 서구 비산1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거기서 살고 있다. 광복 직후부터 사진기를 만졌고, 1962년 대구사우회 회원이 된다. 60년대초 경북여고 시절 대구의 일상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청송·영덕·김천 교육장을 거쳐 97년 구미여중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1965년 동아일보 사진콘테스트, 63년에는 경주 불국사에서 찍은 인물 크로즈업 사진이 US 매거진 콘테스트에서 6위에 입선된다. 그해 호수에 어른거리는 여인의 그림자를 찍어 제1회 대만 국제사진살롱에서도 입선된다. 백두산 천지를 비롯해 뉴질랜드, 호주, 스위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이집트, 그리스, 터키, 스페인, 미국 동서부, 중국 황산, 계림, 장가계, 고비사막 등을 섭렵했다. 75년 대구사우회 회장을 거쳐 2006년 대구사진대전 추천작가가 된다. 96년 동아쇼핑 제1회 사진전을 시작, 현재까지 모두 5권의 사진집을 '징심유관'이란 제목으로 발간했다.

◇…반세기 전 흑백사진으로 되살아난 대구의 뒤안길-

지난주 사진부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사진집 한 권을 보여줬다.

그 사진집은 꼭 반세기전의 대구로 데려가준 '타임머신' 같았다. 사진집은 추억의 덫 같았다. 1960년대 좁다란 골목과 판자집 등이 사진으로 부활했다. 공사 중인 경북 도청 문턱에서 놀고 있는 개구쟁이들, 돛단배가 떠 있는 포항항, 달서천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깡통 찬 거지와 재래식 솜사탕 장사 옆에 운집한 아이들…. 1950년대 대구를 리얼하게 그렸던 소설가 김원일의 명작 '마당 깊은 집'을 떠올리게 하는 반세기 전 빛바랜 대구의 생활상이 수북하게 담긴 귀한 사진이었다.

내년에 여든을 맞는 앙산(昻山) 장원식.

최근 사진인생 50년을 기념해 두 권의 사진집을 자비로 펴냈다. 기자가 본 건 흑백 사진집이었다. 1940~1970년 대구 관련 사진만 100장이 넘었다. 구전으로만 알려지고 있는 팔달교 서쪽 방천에 있었던 주막, 팔공산 순환도로가 생기기 전 동화사 가는 오솔길, 어머니 머리카락 속을 헤집고 이를 잡아주는 딸, 비산성당 언덕에서 바라 본 50년전 대구 도심지…. 여느 대구 관련 사진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들이었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등장한 수성들, 리모델링 직전의 수성못둑, 꼭 다큐멘터리 영화관에 앉아 있는 듯 했다.

'똥도 약에 쓰려면 안 보이는 법'.

반 세기 전 한 도시의 사진도 그랬다. 당시에는 귀한줄 몰랐다. 하지만 그걸 인화해 50년 이상 지니고 있는 이는 드문 법. 숱한 사진작가들이 대구를 촬영했지만 거의 관리소홀로 인해 다 분실해버렸다. 앙산은 좀 달랐다. 여태껏 그걸 품고 있다가 이번에 쏟아낸 것이다. 그는 교직에 있을 때 제자와 윗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서 개인전을 일절 갖지 않았다. 물론 누가 사진을 갖고 싶어하면 대가없이 줬다. 생애 첫 전시회는 그가 교단에서 물러나던 96년에 정년퇴임기념형식으로 열었다.

지난 4~9일 동아쇼핑 전시장에서 생애 마지막 전시회를 갖고 있다. 오는 10~17일 대구 서부문화원에서도 전시회를 갖는다. 그는 다섯권의 사진집의 주제어를 늘 '징심유관(澄心有觀)'으로 정했다. 세상만사 사욕없는 청정한 맘으로 관하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1일 일요일 오후 북비산네거리 근처에 있는 앙산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팔순의

-아니, 내년에 여든이 되는데 어떻게 예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62년 대구사우회 회원이 됐는데 돌아보니 저 보다 나이가 많은 회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대구에서 최고령 현역 사진작가가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이 최고의 건강비결인 것 같아요."

-사진이 그렇게 좋습니까.

"세상사 영원한 것 없다고 하지만 순간의 예술인 사진만은 삶의 어느 한 순간을 고정시켜놓잖아요. 그게 얼마나 멋집니까. 사진없는 제 인생은 생각할 수 없어요. 교직도 남한테 굽신거리지 않고 살기 위해 택한 길이었죠.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걸로 유명해진다거나 부자가 된다는 건 본질에서 어긋난 일이라고 봐요. 사진 촬영은 마음과 영혼은 물론 몸의 건강까지 한꺼번에 낚을 수 있는 최고의 놀거리인 것 같은데 아직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술가와 독립군 아내는 언제나 죽을 고생만 하잖아요.

"지난주에는 전북 임실에 구절초를 찍으러 갔고 그 전에는 전북 고창 선운사에 가서 상사화 무더기를 찍고 왔어요. 아내는 아직도 불만이 많은 것 같아요. 늘 '사진이 돈이 되나 밥이 되나'며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한번은 집을 수리하기 위해 아내가 공사할 인부들을 불러놓았는데 제가 종일 보이지 않자 눈이 빠지게 저를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때 아내한테 말하지 않고 지리산으로 보름 이상 사진찍으러 가버렸어요. 제가 정말 미웠을 겁니다. 전 매사 그런 식이죠. 가족들을 위한 사진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어요. 짚신장수는 헌 짚신 신는다잖아요. 자식들과 아내, 심지어 자기 증명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어주지 못한 것 같아요."

-특히 비산동 관련 사진이 많은데 그때 뭔가 기록을 하겠다는 작정을 하고 찍은 겁니까.

"아닙니다. 아무런 계획은 없고 그냥 내가 태어나고 자란 비산동 언저리를 자주 촬영해뒀는데 산천이 개벽한 지금에 보니 참 귀한 사진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에 생애 다섯 번째 전시회를 여는데 이게 마지막입니까.

"여든을 맞아 기획한 내 생애 마지막 전시회 겸 사진집입니다. 형편없는 사진 갖고 예술혼 운운할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진을 안 잡으면 제 인생이 도무지 성립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밥 먹듯이 계속 사진을 찍어왔어요. 흑백으로 된 4집은 대구 관련 사진 중심으로 편집했어요. 제 손자들에게 옛날 대구의 진짜 모습이 어떻게 된 거라는 걸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어 대구 중심의 작품집을 꾸몄습니다. 5집은 제가 평생 찍은 사진 중에 맘에 드는 것만 골랐어요."

◇…공짜 작품집에 대한 서운함

-이번에도 공짜로 사진집을 나누어 줄 건가요.

"지금까지는 제 사진전시회에 오는 분들에게 답례 차원에서 무료로 사진집을 줬습니다. 그런데 사우회 회원들이 공짜도 좋지만 사진문화 발전을 위해선 사진집을 유료로 나눠주는 게 더 발전적이라는 지적을 해서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권당 2만원입니다. 실제 공짜로 가져 간 사진집을 마구 버리는 걸 보고 가슴 아픈 적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돈 받는다고 욕하지 않을까요?"

"회원들의 지적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공짜를 모두 좋아하지만 그 공짜가 오히려 문화적 황폐를 조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는 사람이라도 돈을 내고 사진집을 가져가면 그만큼 더 애지중지하겠죠."

-사진은 어떻게 해서 시작하게 됐습니까.

"삼촌 때문이죠. 그분이 사진기를 갖고 암실 작업을 할 때 이불을 들어 빛을 차단해주면서 사진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됐죠. 그 덕분에 조모 장례식 때 상여가 비산못 옆을 지나가는 장면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집 옆으로 증기기관차가 지나갔는데 건널목 간수가 없어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빈발했어요. 말발굽이 철로 사이에 끼는 바람에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증기 기관차 지나가는 사진은 지금 봐도 그럴 듯 해요. 어릴적 비산1동 언덕배기에서 바라보면 팔공산과 비슬산, 낙동강, 신천, 금호강이 그림처럼 한 눈에 들어왔어요."

-교직 때 시청각 교육에 헌신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죠.

"제가 지역에서 처음으로 시청각 교육의 신지평을 열었습니다. 도내 각급 학교를 순회하면서 사진교육을 실시했습니다. 학생들이 직접 사진을 현상·인화시켜보면 그냥 활자로 익히는 교육보다 더 학습효과가 있었습니다. 저는 경북여고 등 중고교 내에 사진반도 만들었습니다. 졸업작품전도 교내에서 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지역에선 처음으로 대구역전에 있었던 대구 미공보원에서 일반 작가처럼 당당하게 학생 사진전을 열어줬습니다.

-43회 전국체전이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열렸을 때 경북여고의 매스게임 광경 사진을 많이 담았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님이 대구에서 지휘를 하던 모습, 평균대 위에서 포즈를 취하는 체조하는 여학생, 응원 준비를 하는 여학생, 조야동에서 섶다리를 밟고 팔공산으로 소풍가는 모습 등 당시 여학생들의 생활상을 사진에 많이 담았습니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상도 적잖게 받았죠.

"스스로 만족하는 것 그게 가장 큰 상이죠. 1965년 동아일보 사진콘테스트, 63년에는 모 군수 딸인 제 제자 이모씨를 모델로 해서 경주 불국사에서 찍은 인물 크로즈업 사진이 US 매거진 콘테스트에서 6위에 입선했습니다. 당시 세계 각국에서 무려 30만점이 출품됐다고 하더군요. 불국사에서 찍은 사진 하나가 더 큰 영예를 차지했어요. 불국사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여성 행락객 2명의 모습이 일렁이는 수면에 반영돼 그걸 찍었는데 당시엔 그런 스타일의 사진이 흔치 않았던지 63년 제1회 대만 국제사진살롱에서 입선되기도 했습니다."

-사진 촬영 중 별의 별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네요.

"두 번이나 간첩으로 오인돼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60년대후반 제주도 서귀포로 시청각 교육을 위해 갔습니다. 한 해안에서 숙박을 하는데 밤에 공중에 불꽃 같은 예광탄이 터져 그걸 찍기 위해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해변에 뉘어져 있는 간첩 시신을 보고 사색이 되어버렸습니다. 군인에게 물어봤더니 밤에 해안으로 간첩이 침투해 소탕작전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만약 잘못됐다면 저도 총탄에 맞아 저 세상으로 갔을 수도 있겠죠.

울진 바닷가에서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곤욕을 치렀습니다. 울진교육청에서 시청각교육을 끝내고 한 장학사의 도움을 받아 동해 일출을 촬영하기 위해 새벽같이 해안 절벽으로 가서 사진기를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광경을 목격한 어민이 신고하는 바람에 울진경찰소에서 간첩소탕 작전을 펼쳤죠. 망원렌즈를 낀 사진기가 그들의 눈에는 박격포 정도로 보였겠죠. 당시 오전 4시 전에 해안을 거닐면 군인이 발포해도 할 말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진가라면 이런 일 한두 번 다 겪었을 겁니다."

-요즘 젊은친구와 야외출사를 나갈 때 항상 선두를 달려 적잖은 견제를 받기도 한다는데….

"집단으로 야외 촬영에 나가면 50대가 많습니다. 만약 뒤에 처져서 가다가는 안전사고를 당하거나 변을 당할까 싶어 매번 앞장섭니다. 젊은분들보다 앞서 걸어가면 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뒤에 오는 분들이 저를 챙길 수 있어 불귀의 객이 되는 건 막을 수 있잖습니까. 그런데 다른 분들은 그런 저의 속도 모르고 일행과 동선을 같이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때가 많아요."

-디지털 세상이 되니 편한 것도 있죠.

"편하긴 하지만 색감이 맘에 들지 않아요. 기록성을 위해 디지털 카메라도 가져가지만 이거다 싶으면 반드시 슬라이드로 찍습니다. 사진은 순간의 예술인데 여러 사람과 함께 갈 때 무릎을 칠 만한 절경이 나와도 저 혼자만을 위해 차를 세우지 못할 때 가장 안타깝죠.

-요즘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면서요.

"제 인생에 있어 사진찍기는 어느 정도 할 만큼 한 것 같아요. 뒤늦게 색소폰 연주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1년전에 시작했고 요즘 데니보이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아직 배우는 수준이라서 누구한테 연주를 보여줄 수준은 못됩니다."

임종 직전까지 뭔가 하나에 홀린다는 건 분명 막연한 삶의 불안감을 지워주는 신묘한 힘이 있다.
>>>[포토 그때 그시절] 50∼60전 대구 '빛바랜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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