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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유시민 의원이 의원 선서를 하 고 국회의원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등장 으로 정치권의 ‘신당 논의’가 속도를 더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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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자의 자리를 버리고 관중석으로 들어가 페어플레이를 격려하고 반칙을 응징하는 함성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지난해 8월 초 ‘칼럼니스트’ 유시민(44)이 ‘절필 선언’을 하며 꺼냈던 말이다. 해설자의 자리를 박차고 관중석으로 들어간다던 그가 붓을 꺾은 지 9개월 만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선수’로 정식 데뷔했다.
4월24일 경기 덕양갑 재선거를 통해서다. 각종 언론매체로부터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지만, 실제 선거결과는 25.6%의 저조한 투표율에 43.3% 득표 당선이었다. 사실상 민주당과 연합공천이 이뤄졌음을 감안해 볼 때 ‘유쾌한 정치반란’이 일어났다고 평가하기에는 미흡한 결과였다.
어찌 됐든 유시민씨의 당선은 정치권에 적지 않은 반향을 몰고 왔다. 집권여당 민주당에서는 ‘신당 창당 대세론’이 급부상했고 중도파와 일부 구파 인사들까지 ‘신당 창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유시민 효과’는 민주당에 국한되지 않을 전망이다. 정치권 외곽은 물론 한나라당 내 개혁진영까지 아우르는 정치권 빅뱅까지 예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자에서 관중으로, 관중에서 선수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정치권 빅뱅의 ‘핵’으로 등장한 유시민 의원을 ‘해부’했다.
뭐니뭐니 해도 유시민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으로 꼽힌다. 지난해 8월 ‘절필’을 선언하면서까지 그가 지키고자 했던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가치’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에서 ‘노무현 서포터즈’ 단장으로 변신한 이후 전국적으로 ‘서포터즈’ 규합에 나섰던 그의 노력은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실시된 후보단일화 여론조사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조직한 ‘서포터즈들’은 선거일을 몇 시간 앞두고 예고 없이 찾아온 ‘정몽준 몽니’ 때 놀라운 투혼을 발휘했다. 밤새워 전화와 인터넷으로 투표를 독려하며 ‘열성적 지원군’ 역할을 톡톡히 해냄으로써, 막판 결정적 변수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널리 알려진 노무현 대통령과 유시민 의원의 관계다.
그러나 사실 유 의원이 노 대통령의 대선 행보에 참여한 것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2001년 초쯤인 것 같은데,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을 할 때였다. 대선이 한참 남았던 시점이었지만 그때 유시민 의원은 누나 유시춘씨(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와 함께 노 대통령을 찾아가 ‘다음 대선은 당선 가능성이 충분하다. 대의명분도 있다’며 일찌감치 대선 출마를 설득했다. 그때 이후로 노 캠프의 비공식적 정책참모로 활동하면서 정무적 판단을 도왔다.”
유시민 의원과 함께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던 한 인사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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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8일 개혁국민정당 개편대회에 함께한 유시민 당시 대표(왼쪽)와 노무현 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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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국민경선이 한창이던 지난해 4월 칼럼니스트였던 유 의원은 직접 노무현 후보의 ‘후보 수락 연설문’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2002년 4월27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노무현 당시 후보가 행한 연설문 초안은 유시민 의원의 작품이었던 것.
이후 대선 과정에서도 노 대통령과 유 의원은 거의 매일 통화를 주고받았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해설자’에서 ‘관중석’으로 내려온 유시민 의원이 애초부터 공식 ‘선수’로 데뷔할 생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 의원의 고교 1년 후배로 청와대 국정모니터비서관으로 있는 곽해곤 비서관은 “(유 의원이) 절필 선언 이전까지 줄곧 방송인으로서 언론활동을 목표로 삼겠다고 했다. 직접 정치를 할 생각은 없다고 말해 왔다”며 “워낙 민주당 상황이 ‘반노’ ‘비노’로 나뉘어 노 후보를 흔들어대니까 보다 못해 뛰어든 것 같다”고 ‘절필 선언’을 전후한 유 의원의 심경을 전했다.
그러나 곽 비서관은 “대선이 끝난 뒤에는 노 후보를 당선시켰으니, 이제 정당 및 정치 개혁을 목표로 4월 재보선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비쳤다”고 회고했다.
유시민 의원은 국회의원 당선 이후 자신을 가리켜 ‘새내기 국회의원’이라 칭하고 있다. 그러나 유 의원이 ‘새내기 국회의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정치 신인’은 아니다. 이미 15년 전인 88년 13대 국회 때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권에 첫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보좌관으로 ‘여의도’에 입성한 유시민 의원은 당시 노동위 소속이었던 이해찬 의원을 보좌하며 역시 노동위 소속이었던 노무현 의원과도 처음 연을 맺었다.
당시 여소야대 정국과 3당합당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이해찬 의원을 정무적으로 보좌하면서 이미 탁월한 정치 감각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유시민 의원이 이해찬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 데에는 1980년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당시 복학생조직에서 일하던 이해찬 의원과 함께 활동한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유 의원은 화려한 학생운동 경력으로도 유명하다. 80년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으로 활동하다 강제 징집된 것을 비롯, 84년 학원자유화조치로 복학한 이후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으로 활동하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 당시 유 의원이 작성한 ‘항소이유서’는 80년대는 물론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에 갓 입학한 대학생이 학생운동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는 ‘바이블’로 통하리만큼 유명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인 유 의원은 대학 입학 이후 주로 ‘농촌법학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했다. 당시 서클활동을 함께했던 정치권 인사들로는 한나라당 심재철, 심규철 의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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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이 확정된 뒤 4월25일 기자회견을 가진 김원웅 개혁 국민정당 대표(왼쪽 세번째)와 유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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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클활동을 통해 유 의원은 후배들과 함께 한국현대사, 철학, 경제학, 농촌경제학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대해 두루 세미나를 가졌고, 또 여름방학 중에는 전북 신태인, 강원 원주 등으로 ‘농촌봉사활동’을 다니기도 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과 관련, 곽해곤 비서관은 “당시 내가 현장에 있어 잘 아는데, 유 의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몸이 좋지 않다’며 일찍 귀가했기 때문에 현장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문제가 되니까 복학생협의회장으로 사건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구속됐던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유 의원은 ‘수려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글쓰기’로도 유명하다. 널리 알려진 ‘항소이유서’ 외에도 88년 군대시절 경험을 소설로 엮은 <달>을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하면서 문단에 데뷔했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공저 <광주민중항쟁>은 90년대 학생운동권은 물론, 대학생들의 교양 필독서로 자리매김됐다.
이밖에도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97 대선, 게임의 법칙> 시사비평집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등의 저서가 있다.
유시민 의원의 저서는 대부분 교양서로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지만, 97년 대선을 앞두고 출간한 <97 대선, 게임의 법칙>은 잘못된 분석의 결과물로 남게 됐다. 유 의원은 이 책을 통해 ‘DJP연합의 한계론’에 기초, ‘제2후보 대안론’을 설파했지만 대선 결과는 DJP연합의 승리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시민 의원의 홈페이지(www.usimin.net) 저서 소개란에도 <97 대선, 게임의 법칙>은 저서 리스트에서 누락돼 있다.
유 의원은 97대선 이후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해 “독일에 오래 있다보니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던 세밀한 몇 가지 변수를 놓친 것 같다”고 몇몇 지인들에게 해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을 그만두고 독일 유학길에 올라 지난 97년 석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유 의원은 이해찬 의원이 교육부 장관을 맡고 있던 98년, 학술진흥재단 기획실장으로 컴백했다.
이후 성공회대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몇몇 언론사에 칼럼을 기고하며 ‘칼럼니스트’로 활약했고, 2000년 들어 MBC <100분토론> 사회자로 방송에도 데뷔했다.
97대선 이전 대표적 ‘DJ 필패론자’였던 유시민 의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DJ시대에 새 정치를 향한 화려한 이력을 쌓은 셈이 됐다.
‘해설자’에서 ‘서포터스 단장’으로, 그리고 이제는 ‘선수’로 데뷔한 유시민 의원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그의 너무 빠른 변신에 휘둥그레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또 “당락이 걸린 자신의 선거 앞에 ‘민주당과의 연합공조는 선도 악도 아니다’고 주장했던 유 의원이, 당선 이후 ‘정치개혁’을 앞세우며 ‘민주당은 이제 끝났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며 저급한 현실 정치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혹평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의 출현이 적지 않은 기대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80년 가을 논산훈련소에서 그를 만났다는 강명식씨는 유 의원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유시민은 걱정하는 것처럼 입신양명을 위해 출마하고 의원나리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학생운동할 때부터 정치인을 꿈꾸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이 촌놈은 그러기엔 너무 순진해 보입니다.
아, 물론 저도 ‘혹시’ 하는 우려를 품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까지 그가 해온 짓과 떠든 소리를 보면 정치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소양’이 모자란다는 점에서 안심을 하게 됩니다. 제 뱃속 사정을 잘 모르고 알려고도 않는 스타일이란 게 가장 큰 결함이죠.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말하는 상식들을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촌놈 유시민. 학력이나 경력이 너무 똑똑해 보이는 게 단점이지만 한번 기대해 보실 만한 아마추어의원일 겁니다. 이런 의원도 있다는 걸 한번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로야구 선수의 경우 연봉은 주로 자신이 기록한 성적에 따라 좌우된다.그러나 국회의원의 경우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의원 스스로 기록한 성적보다는 의원에 대한 ‘관중’의 평가에 당락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의원들이 ‘홈 팬’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내기 국회의원’임에도 정계 개편의 핵으로 등장하며 화려한 데뷔식을 가진 유시민 의원. 1년 후 그가 ‘관중’들로부터 어떤 ‘연봉’을 책정받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