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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신 인맥지도 - 대구·경북 지역 인재 - TK 마피아

思美 2013. 4. 1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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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 인맥지도 - 대구·경북 지역 인재 - TK 마피아 | 만물상

 

유림의 전통 맥 이어 한국 주류 세력 산실 되다
경북대·영남대·경북고 등이 인재들의 요람 노릇…수많은 파워 엘리트 배출
[1048호] 2009년 11월 18일 (수) 이춘삼 | 편집위원

   

 

   
▲ 대구시 전경.
ⓒ연합뉴스


‘제제다사(濟濟多士).’ 대구·경북 지역 출신 인사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절로 떠오르는 말이다. 대통령에서부터 중앙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이르기까지 주요 직책의 공직자, 국영 기업체 수장, 국회를 비롯한 정계, 재계, 법조계, 학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등 사회 각계각층에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이 다양하고 폭넓게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어 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로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을 거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임기 말인 1993년 2월까지 31년 9개월 동안 통치권은 이른바 TK(대구·경북)로 불리는 이들의 손에 온전히 쥐어져 있었다. 이들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후세의 사가들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군주제가 아닌 민주주의 정권에서는 그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 집권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인사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대구·경북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 수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지역에서 수많은 인재가 양성되고 배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퇴계 사상과 그에 뿌리를 둔 건학 이념으로 다져진 각급 교육 기관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대구 시내 중앙 네거리 가까운 곳에는 경상감영 터가 있는데,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된 것은 1601년의 일이다. 행정 구역을 정비하면서 8도제를 시행하게 됨에 따라 경주-상주를 중심으로 출발한 경상도는 오늘날의 대구, 경북, 부산, 경남, 울산 5개 광역자치단체를 아우른 지역이었다. 호남 지역에는 전주-나주를 통합해 전라도가 만들어졌고, 전라감영을 전주에 두어 영호남의 두 기둥을 이루었다.

 

영남 지역 사람들은 통일신라 이후 국가 통일의 법통을 자부하면서 벼슬길 진출을 꾸준히 모색했다. 주요 경제적 기반이 농업이었던 농경제 시대에 경제력으로 승부를 걸 수가 없었던 점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지방은 농지가 풍부하고 비옥했던 터라 음식 문화라든가 갖가지 기예가 발달했으나 영남은 이에 따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통일신라의 맥을 이어받았다고는 하나, 척박한 토지로 인해 경제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환경 속에서 학문을 통한 정치적인 주도 세력화를 꿈꾸었고, 그 결과 일정하게 지도층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우리 전통의 맥을 찾자는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한국학의 맥은 두 줄기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의 공맹(孔孟) 사상을 따르는 정통 주자학으로서,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 완성을 도모하자는 것으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가 그것이다. 우리 정신 문화의 또 한 줄기는 공맹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통일신라로부터 연원을 찾아 원효- 일연- 동학의 최제우로 이어지는 3대 성인을 따르는 학맥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어떤 민족에서든 상층 문화와 하층 문화가 공존하게 마련이어서 이 두 계층의 문화가 서로 가까이 다가설 때 민족문화가 형성되고 진취적인 기상이 발현된다고 하는 사상이다. 이렇게 볼 때 사상적 흐름이 굳건하게 자리 잡은 영남 지역에는 신교육이 도입되면서 고등-중등 교육 기관이 일찌감치 자리 잡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

 

   

 

경북대학교는 지역 수재들이 다수 수학한 대구사범(1926년 설립)과 대구의대(1932년 설립), 대구농대(1944년 설립)를 모체로 1951년 국립 종합대학으로 출범한 이 지역 최고의 대학이다. 출범 당시에는 흡수된 사범대, 의과대, 농과대에 문리대, 법정대를 신설해 5개 단과대학 규모였는데 현재는 10개 대학원, 13개 대학, 11개 학부, 80개 학과로 성장했다. 부속병원과 보건진료소는 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료 기관이다. 

 

1967년 12월16일 영남대학교의 설립으로 새로운 명문 사학이 등장했다. 대구대(1947년 설립)와 청구대(1950년 설립)를 합병한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합병 결의문에 들어 있는 ‘영남이 배출한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 이념을 법인과 학교의 교육 정신으로 삼아…’ ‘박정희씨를 우리 법인과 학교의 최고 지도자, 교주로 모시고 그 지도에 따를 것을 결의…’라는 대목에서 이 학교와 박 전 대통령의 관계를 뚜렷이 엿볼 수 있다. 통합 당시 6개 단과대학이던 것이 지금은 13개 단과대학으로 확충되었다. 그 밖의 대학으로는 기독교재단의 계명대학교가 있다. 1954년 계명기독학관으로 설립되어 1965년 계명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78년 오늘날의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남구 대명동, 달서구 신당동, 중구 동산동의 3개 캠퍼스에 20개 단과대학을 수용하고 있다.

 

   

 

1967년 영남대로 흡수 합병된 대구대와는 별개로 한국사회사업대학의 후신으로 설립된 대구대학교가 있으며, 효성여대를 통합한 대구가톨릭대학교도 있다.

 

또, 지역 대학으로는 포스코가 설립해 이공계 대학으로 명성을 얻은 포항공대(포항), 금오공대(구미), 안동대학교(안동) 등이 있다.

 

이 지역에 소재한 유수한 고등학교들 역시 인재 배출에 큰 몫을 했다. 대구·경북 지역을 대표하는 경북고등학교는 지역 수재의 집합처이자 인재의 요람으로 꼽힌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 각지에서 골고루 모여든 수재들이 청운의 꿈을 키운 곳이다. 특히 경북고와 서울법대를 이수한 졸업생들이 관계·법조계를 비롯해 도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경북대 사범대 부속고등학교와 기독교 재단의 계성고등학교(1906년 개교)도 지역 인재의 요람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오랜 전통을 지닌 계성고는 1919년 대구 지방에서 벌어진 3·1 운동의 거점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고교 평준화가 시행된 이후에는 전통 명문고들의 명성도 점차 퇴색해가는 추세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최근 들어서는 대구고, 대륜고, 능인고, 덕원고, 경신고, 경주고, 안동고 등이 앞다투어 우수한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다. 대구고와 대륜고는 지역 내에서 선후배 관계가 깍듯하고 엄격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저명 인사들의 출신 지역을 살펴보면 안동·의성·경주·영주 등지에서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경주 돌이라고 모두 옥돌이냐. 안동 사람이라고 다 인재냐”라는 비유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유교 전통이 뿌리 깊고 선비 정신을 숭상했던 안동에서 예부터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유교 전통은 예의와 염치를 중시한다. 반면, 강한 자존심 때문에 고집이 세고 보수적이고 편협하며 배타적이라는 반성도 뒤따른다.

 

이곳 사람들 사이에는 의리를 중시하는 정서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한 번 ‘의리 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면 주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풍토가 강한 편이다.

 

대구·경북 사람들은 근대화 이후 역사상 중요한 고비마다 민족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시원인 4·19는 대구의 2·28에서 출발했다.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 민주 의거는 부패한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항거한 학생 민주화운동으로 3·15 마산 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져 자유당 정권을 물러나게 만든 기폭제가 되었다.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후의 보루를 지킨 낙동강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일대에서 1950년 8월4일 새벽 1시를 기해 아군이 전개한 방어 전투이다. 전쟁 발발 후 남진을 계속한 인민군은 7월 말 낙동강을 도하해 대구와 부산을 잇는 대동맥을 끊으려 압박을 가해왔다. 아군은 8월과 9월의 반격전에서 전쟁을 조기에 종결지으려고 전 병력을 집결한 인민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거두었고, 이로부터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 1. 퇴계 이황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안동 도산서원.2. 대구 시내에 있는 경상감영 공원.
ⓒ시사저널 사진 자료

 

여기에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구에서 시발된 국채보상운동이 있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1907년 현재 짊어지게 된 외채가 당시 돈으로 1천3백만원에 이르렀다. 당시 정부의 세출 대비 세입의 부족액이 77만여 원인 적자 재정으로 거액의 외채 상환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이에 국민이 나서 주권 수호 운동의 일환으로 벌인 것이 국채보상운동이었다. 전국에서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1천9백여 명 중 대구·경북 출신이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차지하는 것도 이같은 전통적인 맥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박정희·노태우·이명박 등 TK 출신 대통령만 3명

 

정부 수립 이후 수없이 많은 파워 엘리트를 배출해 온 대구·경북 지역 인맥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맞닿는다. 그 자신이 경북 구미 출신으로서 절대 권력을 바탕으로 영남권이 우리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올라서는 데 큰 기틀을 닦았다. 이후 대구·경북은 대구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 포항 출신인 현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쟁쟁한 정치인과 관료들을 다수 배출했다. TK 인맥의 숨은 대부로 꼽히는 고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경북 칠곡 출신으로서 1979년 10·26 신군부 반란 국면에서 총리직을 맡았으며,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제5공화국 출범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정계·관계·재계를 두루 오가며 권력의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신현확 전 총리 외에도 건국 초기에 3대 국무총리를 지낸 고 장택상씨(경북 칠곡)도 TK 출신이다.

 

대구·경북 지역 출신의 역대 정치권 인사들 가운데는 국회의장이 유난히 많다. 6, 7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씨(대구)와 11대 채문식 의장(경북 문경), 15대 김수한 의장(대구), 15대 박준규 의장(경북 달성), 16대 이만섭 의장(대구) 등이 있다. 또, 법조계 인물로 김용철 9대 대법원장(경북 성주)이 있다.

 

대구·경북 출신 경제인 가운데는 정치인이면서 쌍용그룹의 창업주로서 한국의 산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 김성곤 회장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경북 달성 출생인 성곡 김성곤 회장은 국회의원으로서 왕성한 정계 활동을 펼치며 당시 공화당의 실세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재계뿐 아니라 동양통신 등 언론사 사주로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인구가 많은 영향도 있겠지만,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이어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정·관계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해왔다. 현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초기 ‘고·소·영’ 논란에서 ‘영남’이 화두가 되었던 것도 영남권 인사들이 다른 지역 출신들에 비해 수적으로 우대받고 있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은 정·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문화계에서는 특히 작가 이문열의 존재감이 크다. 경북 영양 출생인 이문열씨는 소설 <영웅시대> <변경>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숱한 작품을 남겼으며, 최근에는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으로서 사회를 향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오기도 했다.

 

이 밖에 대구·경북 지역 출신 주요 인사들의 면면은 다음 호부터 분야별로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657

 

 

 

 

역대 정권 실력자 내고 현 정부 실세도 다수 배출
[1049호] 2009년 11월 25일 (수) 이춘삼 | 편집위원

   

 

   
▲ 대구·경북 지역 인재들의 요람으로 꼽히는 경북고등학교.
ⓒ경북고등학교 제공


 

1969년 6월 어느 날 밤. 막 잠자리에 든 신현확씨(당시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 49세)에게 청와대 비서실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총리에 내정되었다”라는 전갈이었다. 신현확씨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성곤 의원은 야심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달려갔다. 신현확씨와 동문 수학한 사이이자 오랜 지기인 김성곤 의원은 쌍용의 사주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어 발언권이 센 인물이었다. “쌍용이 든든해야 당 재정이 튼튼해질 수 있다. 지금 쌍용이 흔들리고 있다. 쌍용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신현확밖에 없다. 신현확을 내게 달라. 정부에는 나중에 불러다 써도 되지 않느냐.” 이런 김성곤 의원의 진언이 받아들여져 인사 내용은 밤 사이 뒤집혔고, 부총리 자리는 경제수석이었던 김학렬씨에게로 돌아갔다.

 

이승만 정부 말기에 이미 부흥부장관을 지낸 신현확씨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부정 선거와 관련해 책임을 졌다. 세간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국무위원 18명 중 여덟 명을 ‘8인의 원흉’이라고 불렀고, 그는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2년 넘게 수감 생활을 한 그는 1964년 8·15 때 특별 사면되자 곧바로 박대통령에게 불려갔다. 같이 일하자는 박대통령의 권유에 그는 “내가 이른바 ‘8인의 원흉’인데 정권 초기에 나를 쓰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다”라며 고사했다. 박대통령이 “그렇다면 바로는 못 도와줘도 옆에서 도와달라”라고 간청해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부총리직에서 면탈(?)이 되고 쌍용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은 신현확씨는 김성곤 의원에게 수락의 조건으로 모든 계열사의 대표이사 인감을 맡겨줄 것을 요구했다. 사주 및 친인척의 간섭을 배제한 가운데 경영에 몰두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4년여에 걸친 각고 끝에 쌍용을 정상화시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9대 국회에 진출했고(공화당, 구미·칠곡·군위·성주·선산) 1975년 보건사회부장관에 취임했으며, 마침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올라 10·26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 12·12로부터 이듬해 5·17 신군부 쿠데타 때까지 총리직을 역임했다.

   

 

 

“경상도 정권 용어 맨 먼저 사용한 이는 이효상 전 국회의장”

 

신현확씨는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와 서울대 법대 전신인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상무성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39세에 장관(부흥부)으로 발탁된 자유당 시절부터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관직을 두루 거쳤고 정·재계에도 큰 영향력을 미친 그는, 10·26 때는 기세등등한 김재규를 눌러 사태를 반전시켰으며 신군부 세력에게도 할 말을 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그가 대구·경북(TK) 출신의 원로로서 대접을 받았고 ‘TK 마피아의 보스’라는 칭호를 들었을 정도로 당시 그 지역을 대표했던 인물로 치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TK 마피아’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쓰일 만큼 박정희 전 대통령 이래로 대구·경북 지역 출신들은 권력의 핵심에서 주류 세력을 형성해왔고, 그에 비례해 한국 사회에서는 ‘경상도 정권’을 비판하는 소리도 함께 높아져갔다. 그 TK와 경상도 정권의 관계를, KBS 보도국장과 내외경제신문 사장을 지낸 최서영씨는 자신이 쓴 책 <내가 본 현장, 여울목 풍경>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18년 동안 계속된 박정희 정권을 흔히 ‘경상도 정권’이라 했다. 박대통령이 경상북도 출신인 데다, 정권의 주요 실세들이 대부분 경상도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상도 가운데서도 경북·대구를 중심한 인맥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TK(대구·경북)’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경상도 정권이라는 말을 맨 먼저 사용하면서 경상도 사람들에게 박정희 정권의 지지를 호소했던 사람은 바로 국회의장을 지낸 한솔 이효상씨였다. 그는 1971년에 있었던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경북 지방 유세를 통해 “솔직히 말해 지금 정권은 경상도 정권 아닙니까. 그러니 경상도가 안 밀어주면 누가 밀어주겠습니까?” 하면서 압도적 지지를 호소하고 다녔다. 이때 박대통령은 3선을 금지한 헌법을 고쳐가면서 출마했기 때문에 여당 안에서도 반대파가 생겼고, 야당들이 3선 출마에 일제 사격을 하고 있어 고전을 면치 못할 때였다. 이효상씨는 ‘경상도 정권’이라는 말이 지방색을 자극해 국민을 분열시킨다는 비판을 인정하면서도 인구 비율로 보아 경상도에서 몰표만 나온다면 선거에 이길 수 있다고 계산한 듯했다. 이 전략은 단기적으로 보아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정치를 괴롭히는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어떤 책략가는 이것을 역이용해 ‘전라도 푸대접’을 들고 나와 호남표를 싹쓸이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충청도 핫바지’론을 외치면서 지역당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 등 지방색은 이제 불치의 한국 정치병으로 악화되었다. 과거 제1공화국과 5·16 이전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다.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서 출마해 당선된 일이 있었고 반대로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서 당선된 일도 있었다. 또, 정당 지지자가 지방별로 편중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경상도와 전라도로 편 가르기가 생긴 것은, 물론 어느 한 사람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6·25 전쟁 때 정부가 피란 다니면서 의지했던 지방이 경상도였고, 그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들이 줄곧 중앙 정계를 지배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 그러나 이효상씨의 발언은, 정치하는 사람은 농담으로라도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일러준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재계에서는 김성곤-김준성-정수창 ‘두각’

 

최씨의 이 지적처럼 1971년 대선 이후 역대 선거에서 지역 분할 현상은 한국 정치에서 고질처럼 자리 잡게 되었고, 그 후유증은 지역 감정이라는 폐단으로 나타났다. 지금도 영남권에서는 민주당 등 야당 의원이, 호남권에서는 한나라당 의원이 거의 나오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고 김성곤 의원은 대구·경북이 낳은 또 하나의 거목이다. SK라는 애칭으로 불린 성곡 김성곤 의원은 그가 했던 모든 일에 ‘大’자를 붙여야 제격이라 할 만큼 큰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정치인, 대실업가, 대언론인, 대문화·육영사업가, 대스포츠맨이 그것이다. 1971년 이른바 항명 파동에 이은 공화당 ‘4인 체제’의 붕괴와 함께 정계를 떠난 성곡은 다양한 분야에서 족적을 남겼다. 은행원 경력과 구멍가게 같은 비누 공장 운영으로 큰돈을 번 그는 방직 공장(금성방직)을 세웠고,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5백60만t 규모의 생산 시설을 갖춘 시멘트 공장(쌍용양회)을 차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양통신 창간과 연합신문 인수, 고려화재해상보험 경영, IPI(국제신문편집인협회) 참여, 국민대학 인수에 이어 대한유도회장 피선, 성곡언론재단·성곡학술재단 설립, 고려대 교우회장 피선, 대한상의회장 피선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재계의 인물로는 김준성 전 부총리나 정수창 전 두산그룹 회장을 꼽을 수 있다. 신현확씨와 1920년생 동갑인 김준성씨는 대구고보와 경성고상(서울대 상대)을 나와 광복 직후 대구에서 메리야스 공장을 차렸다. 1967년에는 대구 지역 상공인들의 힘을 모아 국내 최초의 지방 은행인 대구은행을 설립해 초대 행장을 지냈다. 이후 제일은행장, 외환은행장과 산업은행·한국은행 총재, 은행연합회장을 역임하며 금융인으로 활동했다. 5공 때인 1982년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맡아 연 20~30%의 고물가를 한자릿수로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바 크다. 

 

정수창씨는 박씨 성을 가지지 않고 두산그룹 회장 자리에 오른 대표적인 전문 경영인이다. 경성상고를 졸업하고 동양맥주에 입사하면서 두산가와 인연을 맺은 그는 대한상의 회장도 지냈다. 이동찬 코오롱 그룹 명예회장(포항)은 1957년 부친인 이원만 선대 회장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오늘날의 코오롱그룹을 만들었다. 평소 그림에 조예가 깊은 이회장은 지난 4월 미수(米壽)를 맞아 아끼던 작품 88점을 선보이는 ‘미수전’을 열였다. 고희전, 팔순전에 이은 세 번째 전시회였다.

 

 

 

 

 

 

 

 

차기 대권 주자군에도 TK 출신 여럿 포진

 

김수학 전 국세청장은 경주 출신의 입지전적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주공립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가 경주군 서무과 고원(雇員)으로 출발해 서기, 주사, 사무관을 차례로 밟아올라가 내무부 지방국 과장·전남 부지사·대구시장·충남도지사·경북도지사를 지낸 후 국세청장까지 오른 것은 전례가 없는 기록이다. 팔순의 고령인 지금도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일로 분주하다. 기념사업회를 맡고 있던 신현확 전 회장과 뜻을 같이해 시작한 일이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금진호 상공부장관(영주, 대륜고-서울법대), 김복동 광업진흥공사 사장(청송, 경북고-육사), 금융계의 황제로 불린 이원조 은행감독원장(대구, 경북대), 정춘택 산업은행 총재(대구, 경북고-서울대 정치학과) 등 비슷한 나이의 인사들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고 황태자 박철언 전 체육부장관(성주, 경북고-서울법대)은 노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통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달성)는 지역 민심을 바탕으로 정치의 물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로는 경주의 정수성 의원(무소속)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그 지역에 뿌리를 둔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로 채워져 있다.

 

이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포항 남·울릉)은 13~18대까지 내리 금배지를 단 6선 의원으로 국회의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일의원연맹 회장직을 맡고 있다.

 

재무부 근무 경력에 당 정책위 의장을 지낸 이한구 의원(경북고-서울대 경영학과, 대구 수성 갑),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낸 유승민 의원(경북고-서울대 경제학과, 대구 동구 을), 장덕진 대륙연구소장을 모시고 일한 경험이 있는 이병석 의원(동지상고-고려대 중문과, 포항 북) 등이 당의 두뇌로 꼽힌다. 주호영 의원(울진, 능인고-영남대 법학과)은 특임장관으로 권태신 국무총리실장(영천, 경북고-서울대 경제학과)과 더불어 세종시 문제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김광림 의원(안동농림고-영남대 경제학과, 안동)은 재경부 차관을 지낸 후 여의도에 입성했다.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복귀한 이재오 전 의원(영양, 영양고),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영일, 서울대 정치과)은 현 정권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대통령의 ‘경제 멘토’로 꼽히는 사공일 대통령 특보(군위, 경북고-서울상대)는 G20기획조정위원장으로 위촉되어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그 밖에 여성 장관인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장관(영천, 대구여고-영남대),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예천, 대창고-서울 상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대구, 연세대) 등이 행정부 내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영천, 경북고-서울대 경영학과)는 대권의 꿈을 향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야권에서는 경주 출신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도 차기 주자로 꼽힌다.

 

현 정부 들어 첫 번째 대통령실장을 지낸 류우익 전 실장은 상주 출신으로 청계재단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얼마 전에 주중 대사로 내정되었다. 그 자리를 물려받은 정정길 실장은 경북고와 서울 법대를 나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강의한 교수 출신으로 행정대학원장·대학원장을 거쳐 울산대 총장으로 재직하다가 이명박 정부의 두 번째 대통령실장으로 기용되었다.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했던 6·3 시위 당시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던 이대통령과 함께 100여 일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인연으로 그 뒤 6·3 동지회 멤버로서 꾸준히 친분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는 “학문만 하는 학자는 아니었다”라는 대학 동기생의 증언처럼 학계뿐 아니라 정·관·재계에서도 마당발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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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서울대 법조 라인 막강 학문·문화예술 뿌리도 깊어
[1050호] 2009년 12월 02일 (수) 이춘삼 | 편집위원

   

 

 

   
ⓒ연합뉴스


 

작가 이문열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북 지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역이 안동이다. 안동을 중심으로 동으로 청송과 영양, 서에는 예천, 남에는 의성, 북으로는 봉화가 둘러싸고 있어 이들 경북의 북부 지역 9개군을 안동 문화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각기 지역마다 나름대로 특색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이곳에는 은둔, 은거, 둔피(遁避)의 분위기가 서려 있다.’ 이곳에서 퇴계 이황의 학맥, 유교 문화, 서원 문화가 연면히 흘러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불교 문화권과는 차이를 보인다.

 

예부터 안동은 ‘해동(海東)의 추로(鄒魯)’라고 일컬어졌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은 맹자가 태어난 추 지방과 공자의 모국인 노나라를 합친 말이다. 안동을 해동의 추로라고 부르는 배경에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퇴계가 있다. 

 

안동에는 크고 작은 서원이 34군데나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 도산서원이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도산서원은 퇴계가 별세(1570년, 선조 3년)한 지 4년이 지나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웠으며 그 이듬해 한석봉이 쓴 ‘陶山書院’ 편액을 하사받은 사액(賜額) 서원으로서 영남 유학의 총본산으로 추앙받고 있다. 퇴계가 1561년(명종 16년)에 낙향한 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바라고 세웠던 도산 서당이 있던 곳에 그가 타계한 사당과 서원을 건립해 추증한 것이다.

 

   

 

 

   

 

유서 깊은 서원·동성 마을 많아

 

또한, 하회마을(왼쪽 위사진)은 풍산 류씨가 6백여 년간 대대로 지켜온 동성(同姓) 마을로 서애 류성룡의 출생지이다. 서애가 31세 때인 1572년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풍천면 병산리에 건립한 병산(屛山)서원도 사액 서원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주세붕이 풍기 군수를 지내면서 세운 조선 최초(1543년, 중종 38년)의 소수(紹修) 서원으로 유명한 영주(순흥면 내죽리)는 안동 문화권에 속한다고 말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안동과는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느낀다는 것이다.

 

   

 

영주에 있는 순흥 고을은 우리나라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말 대학자 안향(安珦 : 1243~1306)을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자 충절의 고을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곳이다. 여말과 조선 초기만 해도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 명성이 대단했으나 수백 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던 비운의 고을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다 실패하자 수양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여기에 연루되어 이곳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순흥에서 귀양살이하던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지역 선비들을 규합해 단종 복위 운동을 꿈꾸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천(基川) 현감의 고변(告變) 때문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세조는 안동 부사에게 명을 내려 순흥도호부를 불사르고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 모의에 가담한 자를 모두 처형했다. 뿐만 아니라 순흥 일대 30리 안 고을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역향(逆鄕)으로 낙인 찍힌 영주의 사람들은 조선 초 안동에 비해 컸던 세력을 빼앗겼다고 여긴다.

 

   

 

안동 지역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이곳에 뿌리를 둔 재지 사족(在地士族)은 중앙의 경화(京華) 사족과 달라 벼슬을 하려면 생활의 근거지를 옮겨야 했는데 이들이 출사하면서 솔가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 회에는 정계, 관계, 재계로 나아간 대구·경북 인맥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지만, 대구·경북 지역 출신들의 법조계와 언론계 진출 역시 그에 못지 않게 매우 활발하다. 법조계 인물들을 보면 경북고-서울대 법대의 학벌로 이어지는 법조인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다. 출신 고등학교별로 법조인 숫자를 따져보면 우리나라 법조계에는 서울의 경기고등학교가 단연 1위를 차지하고 그 뒤를 경북고가 뒤따른다. 그 뒤로 경복고나 광주일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현직으로는 구욱서 대전고법원장(의성), 김대휘 의정부지법원장(대구), 김병화 서울고검 차장(군위), 김상준 대법원장 비서실장(상주), 김수학 대구지법원장(대구), 김영한 대구지검장(의성) 등이 있다(표 참조). 부장급 판검사, 평판검사는 하도 많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법원과 검찰의 요직을 지내고 지금은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들 중에는 강신욱 전 대법관(봉화), 강원일 전 검사장(의성), 강철구 전 고법원장(봉화), 권남혁 전 부산고법원장(예천), 권재진 전 서울고검장(대구) 등이 눈에 띈다(표 참조).

 

   

 

 

   

 

대구·경북 출신 언론인 중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거목이 적지 않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 유명한 위암 장지연이 상주 출신이고, 이승만 정권 시절 대구매일신문 주필로서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마라’라는 사설을 집필해 대한민국 언론사상 첫 번째 필화 사건의 주인공이 된 몽향 최석채 선생이 김천 출신이다.

 

현역 언론인으로는 김동철 대구MBC 사장(경주), 김문순 조선일보 부사장(달성), 김창기 조선일보 논설위원(영덕),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의성), 배병휴 경제풍월 대표(김천), 서영관 매일신문 편집국장(대구), 신상민 한국경제신문 사장(문경), 이창영 매일신문 사장(대구), 정해영 조선일보 총무국장(김천),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청송), 최맹호 동아일보 상무(구미) 등이 활동하고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사람들로는 구본홍 전 YTN 사장(대구),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예천), 권오기 전 통일원장관(안동), 금창태 전 중앙일보 사장(안동), 송진혁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대구), 신우식 전 서울신문 사장(김천), 정연주 전 KBS 사장 등이 있다.

 

경북 지역에는 풍산 류씨가 모여 사는 안동 하회마을처럼 동성(同姓) 부락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경주의 양동마을에서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번성한 것도 그렇고, 봉화로 올라가면서도 반듯한 마을에서 가문과 문벌이 형성된 예가 다수 발견된다.

 

경주와 상주에서 ‘경상도’라는 이름이 유래한 데서 알 수 있듯 대구·경북 지역에서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로 자리 잡은 역사·문화·관광 도시이며, 상주는 예로부터 농사가 활발했고 물산이 풍족한 고장이었다. 근자에 들어서는 다른 지역들이 크게 발전해 상대적으로 세가 약해진 느낌이 있으나 삼국 시대부터 쌀, 누에고치, 곶감이 유명해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알려져왔고, 중부 지방과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자 교통의 요충지로도 유명하다.

 

   

 

‘문향의 DNA’가 흐르는 안동·청송·영양

 

그 밖에 몇 개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보면 김천은 경상북도 서북부에 위치해 경부선의 주요 역인 대구-대전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문경과 영주로 통하는 경북선의 시발점이며, 교통망이 잘 발달된 4통5달의 요충이다. 영천은 포은 정몽주 선생과 박인로, 최무선 장군 등 많은 선현을 배출했고 임진왜란과 6·25 전쟁 때 전투가 매우 치열했던 곳이다. 청송, 문경, 봉화처럼 산세가 깊고 험한 지형적 환경 속에서 우수한 두뇌와 강인한 생활력을 지닌 인재들이 많이 나온 것은 그만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투지가 형성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안동, 청송, 영양 등지는 문향(文鄕)의 DNA가 흐르는 지방으로서 유명한 학자와 문인들도 여럿 배출했다. 학계에서는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안동), 김민하 전 중앙대 총장(상주), 김우룡 한국외대 교수(상주), 김철수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대구), 노동일 경북대 총장(대구), 박홍 서강대 전 재단이사장(대구), 배성동 서울대 명예교수(대구), 서정돈 성균관대 총장(대구), 손봉호 전 동덕여대 총장(포항), 신일희 계명대 총장(대구), 임종률 전 중앙노동위원장(대구),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대구), 최송화 전 서울대 총장직대(김천),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칠곡) 등이 두드러진다.

 

문학인으로는 청송 출신의 김주영, 안동 출신의 이육사·유안진·이인화, 영양 출신의 조지훈·이문열, 상주 출신의 성석제, 대구의 김남조 시인이 있다.

 

한 시대 영화계를 풍미한 영화배우 강신성일(영덕)과 영화감독 배창호(대구)·이창동(대구)·김기덕(봉화) 등이 이 지역 출신이고, 스포츠계에서는 김재박 LG 트윈스 감독(대구), 이승엽 야구선수(대구) 가 뛰어나다. 동아일보에 네 칸짜리 시사만화를 그리는 이홍우 화백(영일)과 이현세 만화가(경주)도 있다.

 

※ 인맥 시리즈 ‘대구·경북’ 편은 이번 호로 마치고 다음 호에는 ‘광주일고 대 광주고’ 편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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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만학도사
글쓴이 : 만학도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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