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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했던 근대풍경이 삶내 나는 예술거리로 -한겨레 2014/05/16-

思美 2014. 5. 1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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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했던 근대풍경이 삶내 나는 예술거리로
[문화‘랑’] 문화공간, 그곳
(13) 대구 북성로 공구골목
한겨레  
 

 

2011년 북성로의 옛 일식 가옥을 복원해 문을 연 카페 삼덕상회(사진 중간). ‘북성로 리노베이션 사업’의 첫 성과다.

[문화‘랑’] 문화공간, 그곳
(13) 대구 북성로 공구골목

“보면 볼수록 구조가 놀랍네요. 도대체 이 집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 지…”

건축사가인 조재모 경북대 교수는 피난민이 처음 지었다는 40~50년 전 ‘불량주택’ 앞에서 입을 쩍 벌렸다. 쪽방이 늘어선 하꼬방도, 판잣집도 아니었다. 허술한 나무 뼈대 구조 사이로 얼기설기 흙벽을 치고 방을 마구잡이로 덧대어붙여 2~3층까지 물샐틈 없이 방으로 꽉 채운 집. 30여개 필지에 20여동이 다닥다닥 들어찬 이 집떼들은 몸 누이고 살 곳부터 찾자는 절박감이 빚어낸, 근대 생활사의 아릿한 흔적이다.

지난달 14일 대구 옛 도심인 북성로 동북쪽 태평로변 집합주택 골목은 답사객들로 웅성거렸다. 대구 도심 재생 작업을 벌여온 사단법인 시간과공간연구소의 권상구 이사가 이끄는 근대건축기행길이었다. 마구잡이로 지었지만, 삐죽삐죽 난 들창과 문에 플라스틱판 차양을 달고, 화분을 놓고 공동화장실까지 마련한 삶내나는 풍경. 답사객들은 한숨을 쉬며 생각에 빠졌다.

공구박물관에서 활동가 권상구씨의 설명을 듣는 관객들.
이 집합주택은 북성로 근대유산 요지경의 서막이다. 북성로는 400여채 근대건축물이 남은 타임캡슐이다. 일제강기 대구읍성을 허물고 쌀창고와 백화점 들어선 번화가로 조성했다가 한국전쟁 이후 전국 최대의 공구상 골목으로 바뀐 기구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심지어 90년대 이후 밀어닥친 도심 재개발 광풍도 이곳을 건드리진 못했다. 워낙 퇴락해 땅값이 90년대 초반 수준이고, 대구 도심이 남쪽과 달 서구로 이동한 탓이 컸다. 멋들어진 아치형 창을 지닌 옛 자유당 지부와 30년대 아르데코 양식의 물결 무늬로 겉벽을 장식한 옛 야마구치 도예점 같은 근대건축물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20~60년대 주거구조 변천사를 보여주는 개량형 한옥들도 1000채 이상 흩어져있다.

이런 지역사의 사연을 업고 북성로는 지금 전국의 지자체와 시민단체가 주시하는 도심 재생의 새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이름하여 ‘북성로의 재발견’ 프로젝트다. 지난달 30일 대구 중구청에서는 이 프로젝트 본격화를 알리는 ‘북·서성로 근대건축물 리노베이션사업’ 협약식이 열렸다. 시각과 공간연구소, 대구 사회적기업센터와 중구청이 결성한 리노베이션 위원회의 주도로 북·서성로의 근대건축물 입주를 신청한 11명과 설계를 맡을 16명의 건축사가 손을 잡았다.

타임캡슐같은 옛건물 400여채
민관 협력 문화재생 작업 돌입
영화관, 역사관에서 커피숍까지
“시·공간 되찾은 옛 골목길에
행복한 사람들이 흘러가기를”

이 사업은 북서성로 주변의 근대 건축물 11동을 복원하고 독립영화전용관, 아트샵, 위안부 역사관, 커피숍 등을 들이는 것이 뼈대다. 건물 외관을 원형에 가깝게 개보수하면 공사비용의 범위 80%안에서 최대 4000만원까지 지원한다. 연말까지 개보수를 마치면 앞으로 5년간 원형을 유지해야 한다. 지자체와 시민단체가 협력해 도시재생과 사회적 기업을 위한 투자를 함께 유치한 것은 국내에선 처음 있는 일이다. 수년간 공구장인의 손기술과 문화예술의 궁합을 맞추려는 민관의 밑그림 작업이 신뢰를 끌어낸 셈이다.

2011년 시간과공간연구소 활동가들과 중구청이 건물주를 설득해 공구가게를 개조하고 삼덕상회란 카페를 북성로에 개설한 게 시작이었다. 지난해엔 36년 지은 왜식가옥을 복원해 국내 유일의 공구박물관을 만들었다. 낮에는 장인들의 거리, 밤에는 노년층 놀이터였던 곳에 젊은 문화예술인들의 숨결도 스며들었다.

북성로 들머리의 ‘불량’ 집합주택.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디밴드 연습장과 작업공간을 갖춘 스페이스 우리가 2011년 5월 문을 연 이래 사회적기업센터의 주도로 자전거 복합문화공간인 ‘삼거살롱’(대표 전수윤)도 지난해 개관해 아트 자전거 제작과 예술가 사랑방 역할을 시작했다. 소셜마켓과 건축사무소 아키텍톤 등도 들어서면서 북성로의 문화공간을 찾아드는 젊은이들의 발길도 부쩍 잦아졌다. 권상구 이사는 “원형 복원에 집착하지 않고, 거주자에게 실리를 줄 수 있는 사회적 자본 만들기, 신구세대가 함께 하는 공간 만들기 대안을 고민하고 실천한 성과”라고 했다.

‘리노베이션’의 목표는 공구상 장인의 기술력과 문화예술인들이 만나는 ‘테크 아트’의 결합이다. 2008년부터 대구 근대골목투어를 만들어 반향을 일으켰던 권상구 이사가 주도한 구상이기도 하다. 리노베이션 위원회는 마을큐레이터제, 공구상 장인들의 기술레시피 수집사업, 북성로 역사 스토리텔링, 원로 장인의 성장사를 듣는 강좌와 30인 자서전 발간, 작가와 함께 하는 기술전승워크숍, 키네틱아트공모전 등을 추진할 참이다. 가구, 가정용품을 직접 만드는 DIY를 위한 기술장인의 레시피 북을 만들고 시민체험축제를 여는 계획도 짜놓았다. 공구박물관에 사재를 쏟아부은 권 이사를 비롯해 실무 작업반 ‘마르텔로’를 만든 전충훈 대구사회연구소 사무국장, 엄태수 대구시민센터 부이사장 등이 사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있다.

주민위원회가 결성된 지난달 14일 밤 북성로의 옛 창고를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판에서는 재즈가 흐르는 뒷풀이가 열렸다. 주민과 건축가, 시민단체 사람들이 자리를 메운 가운데 전충훈 국장은 건배사를 외쳤다. “시간과 공간이 복원된 곳에 행복한 사람들이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사람!” “그래, 사람!”

홍대 앞처럼 지역 재생을 추진하다 자본에 흡수당하는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활동가들은 입버릇처럼 다짐했다. 앞으로 5년간 한국 도시재생 과정에서 누구도 가지 못했던 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대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기사등록 : 2014-05-15 오후 07: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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