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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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대구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서 이 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수성구 상동과 서변동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가 출토되어, 이 시기부터 대구지역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구의 청동기 유물은 국보 137호인 비산동의 청동검을 비롯하여, 신천동과 만촌동, 서변동 등 대구지역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타지역의 청동기 유물보다 우수하여 청동기 시대 대구사회의 수준이 다른 지방보다 앞서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 고장에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해방전까지는 대구역 부근, 달성공원 부근을 비롯 동남쪽으로는 봉산동, 대봉동에서부터 수성들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있었으나, 시가지의 확장으로 인해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고인돌은 당시 그 많은 고인돌을 만들 수 있었던 세력집단들의 정치 및 사회상과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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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三國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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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의 대구는 변진 24국 가운데 한 나라로 발전해 왔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261년에 달벌성(達伐城)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국에 속한 큰 읍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689년 신라의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 한 사실과 신라의 오악(五岳) 가운데 팔공산을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도 그때 당시의 대구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행정체계인 군현체제 아래서 대구는 위화군과 달구화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757년에는 위화군이 수성군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으로 개명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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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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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어 역사상 유명한 동수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동수대전은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 견훤과의 싸움입니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경주로 가던 중 동수(동화사 인근지역)에서 만나 일대
격전을 벌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왕건군은 크게 패하여 왕건의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왕건의 심복장수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군이 신숭겸을 쫓아 몰려가는 바람에 군졸로 변장한 왕건은 무사히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장군과 김락장군을 위하여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대구에는 왕건에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게 되었습니다. 즉 왕건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는 파군재(破軍재), 왕건의 탈출로를 비추어 주던 새벽달이 빛났던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등을 비롯하여 앞산의 은적암(隱蹟庵), 왕정(王井) 등은 이 싸움에서 유래한 지명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대구현은 수성군에 영속되어 있었고, 해안현은 장산군(현 경산)에 영속되어 있었습니다. 1143년(인종21년)에 대구현은 현령관으로 승격되면서 점차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또한 12세기 후반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 밀양, 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큰 거점이 되었고, 몽고 침입기에는 팔공산 부인사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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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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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세워진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1394년(태조3년)에 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을 영속하여 확장 발전됨에 따라 1419년(세종1년)에는
대구군으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교육활동이 활발해졌으며, 1448년(세종30년)에는 복지제도인 사창(社倉)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험 실시되어 성공하자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창이란 지방 향촌이 공동으로 설치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흉년이 들 때나 굶는 자가 있을 때 대여하는 제도) 1466년(세조12년)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어 영남내륙 교통의 요지로서 그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1601년(선조34년)에는 경상도 감영을 대구부에 이전 설치하면서 경산현, 하양현, 화원현을 포괄하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영남지방의 행정,사법,군무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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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近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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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구는 갑오개혁(1894년) 때까지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추기능을 계속하여
수행해 왔고, 1895년 도(道)제도는 폐지되고 중앙에서 전국 23부(경상도:대구부, 안동부, 진주부,
동래부)를 바로 관할하게 되어 대구부 관할의 대구군으로 개칭되었으나 부청 소재지로서
그 관할구역과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1914년에는 다시 부제를 실시했으나 시가지 일대만 대구부로 독립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거점으로서의 역할 수행과 근대적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것이었습니다. 1907년에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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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現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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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이후 대구는 해외 귀환 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급격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대도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칭되었으며 1950년 6.25 동란시에는 낙동강 방어작전의 최후 보루도시로 민주주의를 지킨 역사에 길이 남을 대구 방어전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구의 문화예술인은 민족의 애환을 그리는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현대 문화예술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심화되고 있을 때,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켜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2.28학생의거는 그 뒤 4.19의거로 연결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981년 달성군의 월배, 성서, 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하였으며, 1988년는 달서구가 신설되어 7개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1995년 1월에는 지방자치의 완성년도로 중앙정부직할의 시(市) 명칭을 대구광역시로 개칭하여 지방화시대의 원년을 맞이하였고, 1995년 3월에는 달성군을 편입하여 "7개구 1개군"으로 행정구역이 광역화되어 영남권 중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본선경기를 치르고 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