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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시디자인 탐사](9)대구읍성 해체와 식민도시화 | |||||||||
입력: 2007년 11월 01일 17:46:05 | |||||||||
-동성로·남성로…거리명만 남은 ‘통한의 城’- #대구의 화기(火氣) 가을이 깊어간다. 한여름 무더위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지금쯤 대구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의 울창한 가로수에도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을 것이다. 사실 대구의 무더위는 한 뼘의 나무 그늘이 아쉬울 정도로 살인적이다. 대구시가 지난 10여년간 녹화사업에 정성을 쏟아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구 인근 영천에서 잠시 군복무를 했던 나는 대구분지의 기후가 얼마나 혹독한지 잘 알고 있다. 살을 에는 겨울의 칼바람과 여름날 아스팔트 도로를 녹이는 무더위가 온몸으로 기억된다.
대구의 기후가 이렇듯 혹독한 것은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의 분지지형 탓에 대기의 소통이 원활치 못한 때문이다. 따라서 옛 대구인들은 지형과 기후를 풍수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한 듯하다. 대구에는 오늘날까지 화기(火氣)를 다스리고 지맥의 소통을 위한 ‘비보풍수’가 전해지고 있다. 비보풍수란 지형이나 산세의 풍수적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를 뜻하는데, 현재 대구제일여중 본관 앞에 있는 ‘돌거북(龜岩)’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학교 자리가 바로 ‘동국여지승람’에 진산으로 표기되어 있는 연구산(連龜山)이다. 연구산은 그 명칭이 암시하듯, 돌거북을 만들어 머리는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하여 지맥(地脈)을 연결시킨 데서 유래한다. 일설에 의하면, 거북의 머리 방향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비슬산의 화기를 막기 위함이란다. 지금도 대구의 풍수전문가들 중에는 과거 서문시장의 화재나 상인동 가스폭발사건과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등 화재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방치된 이 돌거북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이로 인해 2003년 ‘달구벌 얼 찾는 모임’을 중심으로 대구인들이 돌거북 바로 놓기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사라진 달서천과 대구천 문헌조사와 현장답사의 결과, 연구산 돌거북은 비슬산의 화기를 다스릴 목적과 함께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즉, 대구 도심에 흐르던 사라진 옛 하천들의 원활한 흐름을 기원할 목적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 비슬산의 화기는 그 자체보다는 원활치 못한 대기의 소통으로 인한 심한 기온차이와 건조한 분지지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옛 대구에는 북쪽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금호강’과 시가지 동쪽에서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신천’ 외에 ‘달서천과 대구천’이 있었다. 이 둘 모두 남쪽의 ‘앞산’(본래 이름은 성불산)에서 발원해 상동교와 봉덕시장을 지나 건들바위 네거리 부근에서 갈라져 시내를 관통한 후 금호강으로 흘러들었다.
달서천은 건들바위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흘러갔고, 또 다른 지류는 일제강점기에 매립되어 서문시장이 들어선 ‘천왕당못’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와 합류해 달성의 자연 해자(垓子) 구실을 했다. 반면에 대구천은 건들바위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대봉동, 봉산동, 삼덕동을 지나 칠성동에서 신천과 합류해 금호강으로 흘러들었다. 자료에 따르면, 달서천은 장마철에 잦은 범람으로 수해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에 1926년 무렵 치수공사가 진행되어 시가지 내부로 유입되던 물줄기가 끊겼고, 해방 후 복개공사로 인해 달서천과 대구천이 사라진 것이다. 결국 달서천, 천왕당못, 대구천이 사라지면서 잦은 범람과 수해는 막았지만, 역으로 자연 냉각기능이 사라져 대구의 화기가 강해진 셈이다. 이로써 돌거북의 의미가 좀더 분명해 진다. 거북은 예로부터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뜻하며, ‘기(氣)를 마시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연구산 돌거북은 비슬산의 화기를 막고 앞산에서 발원하는 달서천과 대구천의 원활한 흐름을 기원했던 비보풍수 차원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대구읍성의 기억
우아한 누각과 아름다운 전경을 자랑했던 대구읍성은 원래 선조 23년(1590)에 토성으로 축성되었다. ‘경상감영 4백년사’에 따르면, 이 토성은 1592년 임진왜란 중에 왜장 고니시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오면서 대구는 경상도의 행정, 사법, 군무를 담당하는 권력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평지에 축성을 반대했던 조정 내부의 이견으로 성이 없이 감영만 두었다가, 1736년 영조 때에 비로소 석성을 축조했다. 총 둘레가 약 2.7㎞(2124보)이며,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진동문, 달서문, 남문인 영남제일관, 공북문), 동과 서에 두 개의 소문, 4개의 망루가 설치되었다. 오늘날 대구에서 패션과 유행의 1번지는 ‘동성로’다. 이곳을 오가는 젊은이들 중에 이 길이 대구읍성의 동쪽 성벽에서 유래된 사실을 과연 몇이나 알고 있을지 궁금하다. 현재 대구의 명물 약전골목이 들어서 있는 남성로 역시 성벽의 남쪽 구간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대구 중심가를 형성하고 있는 대구읍성은 국권이 침탈되기도 전인 1906년 말부터 해체된 ‘통한의 성’이기도 하다. 성은 사라지고 중구 포정동, 북성동, 성내동 북성로, 서성로 등 성곽과 관련된 거리명만 남아 옛 대구읍성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다. #식민지 도시화 대구의 식민지 도시화 과정은 좀 특이하다. 앞서 언급한 부산과 인천 같은 항구도시와는 물론 다르고, 대전과 같은 유사한 내륙도시와도 판이하게 달랐다. 대구는 도시의 중심을 통째로 일제에 내준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제강점기 대구의 도시화 성격을 규명한 사학자 김일수 교수에 따르면, 대부분 다른 광역도시들은 대체로 일본인 시가지가 따로 형성되고, 거기에 각종 행정기관이 옮겨지는 이른바 ‘중심이동’ 형태였다. 반면, 대구는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면서도 이내 기존의 조선인 중심지역을 점거하고, 도시공간을 확대해 나간 소위 ‘중심점거’ 형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유방식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가능했다. 첫째는 러일전쟁을 위해 일제가 부설한 경부선 공사로 내륙에 일본인의 유입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구일본거류민회를 설립하고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자 미리 매입해 둔 땅을 개발하기 위해 대구읍성의 성곽 해체를 요구했다. 둘째는 경북 관찰사서리 겸 대구부사였던 박중양(朴重陽, 1874~1958?)과 같은 친일파들의 역할이다. 박중양은 조정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던 것이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속에 가능했고, 조선정부의 징계는커녕 오히려 평남관찰사로 영전했다가 1908년에 다시 경북관찰사로 대구에 오게 된다. 이후 그의 친일행각과 학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원성을 담은 ‘중양타령’이라는 노래까지 나왔을 지경이었다.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금시계 선물을 받았을 정도로 감사의 대상이었고, 마침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란 최고 지위까지 올랐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며칠간 감옥살이를 했을 뿐 곧 풀려나 잘 먹고 잘 살다간 친일파의 전형이었다. 친일파 박중양 덕분에 대구읍성을 해체한 일인들은 헐값에 사들인 도원동 일대 저습지를 헐어낸 성토와 석재로 매립해 큰돈을 벌었다. 여기에 일인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춰 경상감영을 칼로 베는 십자로를 개설하고, 1909년 대구일본이사청과 대구경찰서를 필두로 대구공소원(1910), 대구우편국(1912), 대구역(1913) 등의 공공건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의 건축양식은 벽면에 비늘판 마감이 특징인 르네상스풍의 목조 화양절충식이 주종을 이뤘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구의학전문학교(현 경북대 의대)에서 보듯이, 일제의 권위와 자신감을 표현한 건축물이 등장한다. 또한 조선인의 영혼지배를 목적으로 달성에 세운 ‘황대신궁 요배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해 1914년에는 ‘대구신사’를 조성했다. 오늘날 달성공원의 원형광장을 통과하는 진입로는 정문과의 축이 엇각이다. 이는 원래 정문과 축을 이루던 대구신사의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해 새로 진입로를 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달성공원의 대구신사는 철거되었지만 아직도 대구읍성의 상처는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채 곳곳에 남아 있다. 읍성이 해체되고 경상감영의 바깥문 관풍루는 1920년 경 그 자리에 헌병대가 들어서면서 철거되어 달성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 역시 헐렸다가 1980년에 엉뚱한 장소인 금호강가 망우공원에 복원되었다. 게다가 달성공원에 복원된 관풍루는 원래 모습도 아니다. 옛 사진자료 속의 관풍루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정면 3칸 중에 오른 칸 뒤쪽에 붙어 있었지만 지금은 가운데 칸에 설치되어 있다. 무늬만 관풍루인 것이다. 이렇듯 엉뚱한 곳에 잘못 복원된 관풍루의 기구한 팔자와 함께 또 다른 서글픈 풍경이 달성공원에 펼쳐져 있다. 1964년 최제우 순교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동학1대 교주 수운 최제우의 동상이 바로 그것다. 동학운동의 수괴로 경상감영에서 1864년 처형당한 수운의 동상을 제작한 사람이 친일조각가 윤효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1945년 가미카제 특공대로 일왕에 목숨을 바친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의 아들 소상을 제작해 총독부에 헌정하는 등 대표적인 친일미술가였다. 천도교와 수운교에서 친일조각가의 손으로 제작된 수운의 동상을 세워 기념하는 일은 한마디로 코메디라 하겠다. 그는 왜 순교를 했는가? 헷갈릴 따름이다. 대구시는 최근 도시녹화사업으로 시민들에게 신선한 산소와 싱그러운 환경을 성공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자연 경관의 장점이 훼손된 상태에서 대구의 화기를 다스리기 위한 현대식 자연녹화계획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더 나아가 훼손된 도시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강구할 차례다. 〈김민수|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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