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사람사는세상

덕수궁 -2009/5/27-

思美 2009. 7. 12.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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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어당: 석어당은 임진왜란 후 선조 임금이 거처하셨던 건물로써 한자를 풀이하더라도 옛날 임금님이 머물렀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조 임금이 이곳에서 16년간이나 머무시다가 1608년 승하하신 곳이다. 그 후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머물기도 하셨다.
석어당은 경운궁 내에서 유일한 2층 건물이며,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눈에 띤다.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조임금이 임진왜란 이후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셨기 때문에 그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칠해지지 않았다고도 하고, 또 유교 사회의 검약을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04년 화재 이후 중건된 것이며, 아래층은 정면 8 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인 팔작 지붕의 건물이다. 

 준명당 : 중화전이 공식행사를 하던 곳이라면 준명당은 고종이 실질적인 업 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편전(便殿)이었다. 이곳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광무 원년(1897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이곳을 준명전이라 불렀다가 언제부터인가 준명당으로 바뀌었다.
전각이름에 붙게 되는 전(殿)은 당(堂)보다 격이 한 단계 높은 것으로서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물인 왕비 혹은 대비 등과 관련된 건물에만 붙게 된다. 고종 나이 예순에 양귀인 과의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1916년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즉조당과는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조당 : 즉조당의 의미는 왕이 즉위를 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여기에서 조선조 제15대 광해군과 제16대 인조가 즉위하셨다. 현재의 중화전이 지어지기 전에 이곳이 임시 정전(正殿)으로 사용되면서 광무 원년(1897년)엔 태극전 이라 하였다가 이듬해에 중화전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1902년 지금의 중화전이 지어지면서 다시 원래의 이름인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고종의 후비인 엄비가 돌아 가실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즉조당 현판을 보게 되면 어필(御 筆)이라는 한자와 광무구년을사칠월(光武九年乙巳七月)이라는 한자가 쓰여있다.
어필은 왕이 쓰셨다는 뜻이므로 고종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광무는 대한제국의 연호이니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불에 타 버려 1905년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중화문 : 법전인 중화전의 정문에 해당되는 문이다. 중화문은 현재 단독 건물 처럼 남아 있으나 원래는 다른 궁궐에서와 같이 좌우로 연결된 회랑이 동서쪽으로는 물론 거기서 다시 남에서 북으로 연결되게 둘러져 있어 중화전 마당 조정(朝廷)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다 철거되고 이 문 동쪽에 그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을 보면 공포 있는 곳에 망이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부시라고 하는데 이는 새가 둥지를 틀게 됨에 따라 구렁이 등에 의해 살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새의 분비물에 의한 건물 부식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다. 중화문의 둥그런 기둥과 네모난 주춧돌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철학사상을 따른 것이다. 중화문을 보면 가운데가 양쪽보다 크고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어문(御門)으로 임금이 지나는 문이기 때문에 신하들이 지나는 문과 차이를 둔 것이다.

 

중화문에서 중화전을 바라보면 바닥은 박석이 깔려 있고, 벼슬 아치의 높낮이 순으로 관계(官階)의 품(品)을 새겨 세워둔 품계석이 있다. 맨 앞줄에 있는 정일품이 최고의 품계이다. 중화문을 거쳐 삼도를 따라 들어서면 하월대의 석계에 이르고 이 석계를 오르면 다시 상월대 석계에 다다른다. 넓은 이중 월대 위에 우뚝 솟은 전각이 바로 중화전이다.

중화전은 경운궁의 정전(正殿)으로 보물 제 8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왕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조례를 행하며 공식적인 행사를 집행하였던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로, 1902년 건립되었으며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06년 중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중층 건물이었으나 다시 지을 때는 단층으로 중건되어 현재도 단층 지붕으로 남아있다.

중화전 안에 있는 어좌는 부처의 자리와 같이 꾸며 높게 마련한 용상위에 놓는데, 머리 위에는 보개를 두고 포작으로 닫집을 짰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을 쳐서 임금의 권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석조전 :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된 지상 3층 연건평 1,247평 의 석조 건물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고문 이었던 영국인 브라운의 발의에 의하여 영국인 기사 하아딩에게 의뢰하여 설계되었다. 
 1904년 11월 브라운은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와 교체되며 자연스레 건축 주도권도 넘어가서 결국 그에 의해 완공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2층에 접견실, 3층에 황제의 침실, 1층(반지하)에 시종들의 대기장소를 두었다.
건축양식은 희랍 로마양식의 복고로 구미(歐美)에 유행하였던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의 일종으로  신고전주의를 따른 것이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946년 1월 16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로 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그 첫 예비회담이 열렸다.

 광명문 : 1897년에 건립하였으나 1904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 시 흥천사종과 보루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흥천사종 : 이 종은 1462년 7월 이태조(李太組)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종은 신덕왕후 능의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년(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년(1747년)에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 한일합방 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겼다.

 자격루 : 1536년 (중종 31)에 만들어진 물시계
물을 보내는 파수호(播水壺)가 3개, 물받이인 수수통(受水筒)이 2개 남아 있는데,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에 의해서였다. 장영실의 물시계는 정해진 시각이 되면 격발장치를 건드려 쇠알이 굴러가서 여러 운동을 하게 만든 것이다. 종·북·징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는 장치는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장영실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물시계는 경복궁에 보관되었는데 남아 있지 않고 중종 때 이를 본떠서 다시 만든 것이 창경궁 보루각에 보관되었다가,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대파수호와 수수통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수수통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모양을 양각해 놓았는데 중종 때 이를 만든 우찬성 유부(柳溥), 공조참판 최세절(崔世節) 등 참여자 이름이 적혀 있다.

 

 드므가 놓였던 자리

 덕수궁에서 바라본 서울광장. 경찰버스가 환상적으로 주차되어 있다.

 

 

1960년 Smothers 촬영 

경운궁(덕수궁)의 역사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은 원래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였다가 1년 반 만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병란에 소실된 까닭에 머물 궁이 없었기에 왜군들이 주둔하여 파괴를   면한 당시 황화방(皇華坊:정릉동 일대)의 종친과 양반가 등의 민가들을 수용하여 임시 궁궐로 개조, 정릉동 행궁으로 삼고 시어소로 머물게 되었다.
생전에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결국 이곳 행궁에서 승하하신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에 창덕궁 복구 공사가 마무리되자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하였고, 광해군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 한편 1623년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경운궁 별당(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 석어당과 왕비의 궁방인 명례궁 건물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떠나게 된 후로 경운궁은 어려운 시절의 쓰라림을 회상하는 뜻 깊은 공간인 궁으로 남게 되었다.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친일적인 관료들과 일본의 압력이 가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건양 2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지면서 경운궁은 고종에 의해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런데,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이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밀사를 파견한 사건을 트집잡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 시킨다. 1907년 8월 경운궁 돈덕전에서 황제즉위식을 가진 순종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함으로써 경운궁은 마침내 궁궐로서의 임무를 다하게 되었다.

한편,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가 붙여지게 되면서 오늘날의 덕수궁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데, 덕수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조선 초 정종에게 양위(讓位)하고 물러난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 이기도 했다. 이처럼 덕수궁이란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인 것이다.
1919년 고종이 침전인 함녕전에서 승하하면서 주인 없는 궁궐 덕수궁은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고, 전각들이 파괴, 왜곡되었다. 1922년 일제는 선원전의 터를 통과하는 도로를 뚫었는데 이 길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며, 이때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엄비의 혼전은 헐려 경기여고가, 또 도로의 동편에 있던 제사준비소 터에는 지금의 덕수초등학교가, 1927년에는 경성방송국이 건립되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궁내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게 되어 훼철된 덕수궁은 1933년 10월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현재 남아 있는 경운궁의 영역은 대한제국 당시의 1/3정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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