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군위에 있는 인각사(麟角寺)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一然·1206~1289) 국사가 말년에 주지로 계셨던 일세의 명찰이었다. 일연 스님이 열반에 들자 나라에서는 보각(普覺)이라는 시호와 함께 스님의 사리탑에 정조(靜照)라는 이름을 내려주면서 당대의 문장가인 민지(閔漬)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글씨는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의 유려한 행서를 집자(集字)해 새기도록 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이다. 이 비는 중국에서도 드문 왕희지 집자비인지라 금석학(金石學)과 서예사에서 보물로 삼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인각사는 퇴락을 면치 못했다. 아름다운 화산(華山·828m)의 기품 있는 자태가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의 뿔[角]을 닮았다 해서 인각사라는 신비로운 이름을 얻었지만 이제는 궁벽한 산골의 초라한 절집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게다가 〈보각국사비명〉은 임진왜란 때 박살이 나 간신히 밑동만 남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각사는 폐사나 다름없었다. 번듯한 법당 하나 없이 절 마당에는 기단부를 잃은 엉성한 삼층석탑, 전각 없이 쓸쓸히 나앉은 석불좌상, 다 부서진 비의 잔편, 제자리를 잃은 사리탑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그 황량함이 민망할 정도였다. 게다가 한때는 수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연전부터 인각사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불교계·학계·문화재계의 각성으로 하나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절터 발굴 중에 고려시대를 대표할 청동정병(靑銅淨甁)을 비롯한 불구(佛具)들이 출토되어 이 절집의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태 전에는 일연 스님의 비를 다시 세워 놓았다. 옛 탁본을 토대로 한 금석문연구가 박영돈 선생의 30년 집념으로 완벽하게 왕희지 집자비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사라진 비석받침[귀부·龜趺]과 지붕돌[이수·�u首]은 미술사가들의 고증으로 동시대 유물인 강진 백련사비(白蓮寺碑)의 예에 따랐다. 우리 시대에도 이렇게 자랑스러운 문화재 복원이 있다는 감회에서 비문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무서운 불[劫火]이 활활 타서 산하(山河)가 모두 재(災)로 될지라도 이 비만은 홀로 남고 이 글만은 마멸되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인각사는 퇴락을 면치 못했다. 아름다운 화산(華山·828m)의 기품 있는 자태가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의 뿔[角]을 닮았다 해서 인각사라는 신비로운 이름을 얻었지만 이제는 궁벽한 산골의 초라한 절집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게다가 〈보각국사비명〉은 임진왜란 때 박살이 나 간신히 밑동만 남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각사는 폐사나 다름없었다. 번듯한 법당 하나 없이 절 마당에는 기단부를 잃은 엉성한 삼층석탑, 전각 없이 쓸쓸히 나앉은 석불좌상, 다 부서진 비의 잔편, 제자리를 잃은 사리탑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그 황량함이 민망할 정도였다. 게다가 한때는 수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행히 연전부터 인각사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불교계·학계·문화재계의 각성으로 하나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절터 발굴 중에 고려시대를 대표할 청동정병(靑銅淨甁)을 비롯한 불구(佛具)들이 출토되어 이 절집의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태 전에는 일연 스님의 비를 다시 세워 놓았다. 옛 탁본을 토대로 한 금석문연구가 박영돈 선생의 30년 집념으로 완벽하게 왕희지 집자비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사라진 비석받침[귀부·龜趺]과 지붕돌[이수·�u首]은 미술사가들의 고증으로 동시대 유물인 강진 백련사비(白蓮寺碑)의 예에 따랐다. 우리 시대에도 이렇게 자랑스러운 문화재 복원이 있다는 감회에서 비문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무서운 불[劫火]이 활활 타서 산하(山河)가 모두 재(災)로 될지라도 이 비만은 홀로 남고 이 글만은 마멸되지 않게 하소서."
- 입력 : 2009.08.12 22:02
군위 인각사(麟角寺)가 제 모습을 찾아가는 길은 절터의 발굴 결과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문헌상의 기록일 것이다. 마침 이색(李穡;1328~96)의 '목은집(牧隱集)'에는 '인각사 무무당기(無無堂記)'라는 글이 실려 있다. 목은 선생이 낙서(洛西·낙동강 서쪽)지역의 절집을 두루 들러 보던 중, 상주 남장사(南長寺)에 이르렀을 때 인각사 스님 창공(窓公)이 새로 지은 무무당에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에 목은은 자신은 유학자이지만 스님의 세계에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함이 있어 좋아한다고 한 차례 불가(佛家)를 칭송한 다음, 인각사의 가람 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소견을 피력했다.
"대체로 이 절의 불전(佛殿)은 높은 곳에 있고 마당 가운데 탑이 있으며 왼쪽에 무(��·강당)가 있고 오른쪽에 선당(膳堂·살림채)이 있다. 그러나 왼쪽 건물은 가깝고 오른쪽은 멀어 건물배치가 대칭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무무당을 선당 옆에 세워 좌우균형이 맞게 되었다. 그러나 새 건물이 들어섰어도 기존의 선당이 치우쳐 있다는 점을 면키 어려우니 역시 조금 옆으로 옮겨야 절의 모양과 제도가 완벽해지겠다. 지금 못하더라도 뒷사람들이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목은은 이처럼 건축에 대해 상당한 안목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목은은 이 기문에서 무무당의 뜻풀이는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목은은 이렇게 말했다. "무무당의 뜻은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모르는 사람만 답답할 뿐이다. "무무"란 "없고 없다"는 뜻도 되지만 반대로 "없는 게 없다"는 뜻도 된다. 어느 쪽일까? 이 오묘한 뜻을 알고 싶어 여러 전거를 찾아보았다. '회남자(淮南子)'에 무무라는 말이 잠시 나올 뿐이었는데 그것도 이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러던 중 몇 해 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낙성식에 갈 때 마침 조계종 본사(本寺) 주지들과 같은 버스를 타게 되어 이 당대의 고승들에게 공개적으로 그 뜻을 물어본즉 돌아온 대답은 더더욱 오묘했다. "없고 없는 게, 없는 게 없는 것 입니다." 목은 선생의 말대로 불가에는 참으로 호방한 기풍이 있다.
"대체로 이 절의 불전(佛殿)은 높은 곳에 있고 마당 가운데 탑이 있으며 왼쪽에 무(��·강당)가 있고 오른쪽에 선당(膳堂·살림채)이 있다. 그러나 왼쪽 건물은 가깝고 오른쪽은 멀어 건물배치가 대칭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무무당을 선당 옆에 세워 좌우균형이 맞게 되었다. 그러나 새 건물이 들어섰어도 기존의 선당이 치우쳐 있다는 점을 면키 어려우니 역시 조금 옆으로 옮겨야 절의 모양과 제도가 완벽해지겠다. 지금 못하더라도 뒷사람들이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목은은 이처럼 건축에 대해 상당한 안목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목은은 이 기문에서 무무당의 뜻풀이는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목은은 이렇게 말했다. "무무당의 뜻은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모르는 사람만 답답할 뿐이다. "무무"란 "없고 없다"는 뜻도 되지만 반대로 "없는 게 없다"는 뜻도 된다. 어느 쪽일까? 이 오묘한 뜻을 알고 싶어 여러 전거를 찾아보았다. '회남자(淮南子)'에 무무라는 말이 잠시 나올 뿐이었는데 그것도 이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러던 중 몇 해 전,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낙성식에 갈 때 마침 조계종 본사(本寺) 주지들과 같은 버스를 타게 되어 이 당대의 고승들에게 공개적으로 그 뜻을 물어본즉 돌아온 대답은 더더욱 오묘했다. "없고 없는 게, 없는 게 없는 것 입니다." 목은 선생의 말대로 불가에는 참으로 호방한 기풍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