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진골목 스토리…①토박이 김유자씨 -090709-

思美 2010. 4. 1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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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진골목 스토리…①토박이 김유자씨
 
진골목-진골목의 유래를 알려주는 비석. 진골목 정소아과 근처에 있다
 
열네 살 때 진골목으로 이사와 50년을 살고 있는 김유자씨.
스토리는 휘발성이 강하다. 붙잡아두지 않으면 금세 사라진다. 오래 우리 곁에 두고 재미를 느끼려면 원형을 찾아내고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토리의 원형은 낡은 역사책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위대하거나 유명한 사람들의 행적에 뒤따르지도 않는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기억 속에, 가슴 속에, 생활 속에 녹아 있다. 그 원형을 찾아내는 일이 우리가 사는 도시의 스토리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진골목은 대구 도심에 흐르는 스토리를 찾으려 할 때 가장 먼저 꼽을 장소 가운데 하나다. 지금의 중구 종로 홍백원 오른쪽에서 중앙시네마 뒤를 지나는 골목으로, 조선시대에는 국일따로국밥 왼쪽으로 경상감영까지 이어졌던 길이다.

골목의 긴 역사는 많은 스토리를 낳을 법하건만 진골목에는 이야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달성 서씨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다는 것,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패물폐지부인회의 활동장소였다는 것 등이 기록으로 전해질 뿐 서씨 일가의 성쇠나 골목을 구성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 힘들다.

그나마 20세기 초반 상황은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변화상에 대해서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대구의 대표적인 골목이라고 하기에 머쓱할 정도로 관심이 끊겼다.

그럼에도 진골목은 대구 도심의 소중한 스토리 자산이라는 생각에 가장 먼저 찾아갔다. 골목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활동, 환경 사이의 오랜 상호작용 속에서 문화를 만드는 게 당연한 이치. 세월의 흐름 속에 깃들였던 사람들은 떠나고 지금은 식당 간판들이 어지럽게 벽면을 차지했지만 한옥과 근대 건축물 속에 남은 사람, 남은 물건들은 있었다. 그 속에서 소중한 스토리의 원형들이 숨 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진골목(긴 골목의 경상도 말에서 비롯된 이름)의 길었던 골목은 새 길이 뚫리며 허리가 잘려 짧아졌지만 골목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시간적으로 긴 골목을 만들었다. 도심 속 섬이 아니라 느리지만 움직이고 변화하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식당과 점포들이 온통 차지해 실제 거주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진골목에서 김유자(64·여)씨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1945년 동성로에서 태어난 김씨는 열네 살 때 진골목으로 이사해 지금껏 살고 있다. 결혼 생활 5년을 봉덕동에서 보내고, 직장 생활 20년을 서울서 지냈지만 그 동안에도 부모님이 사는 진골목에는 매주 들렀다고 한다. 8년 전 연세가 많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진골목 친정에 돌아온 그는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진골목을 지키고 있다.

◆일대에서 처음 생긴 숙박업소

“아버님은 일본에서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돌아와 공무원이 된 뒤 철도국 고위직까지 올랐어요. 제가 대구여중을 다니던 열네 살 때 이사왔어요. 진골목 일대를 소유했던 달성 서씨 가운데 서병국씨 집터였는데 그때는 동성로보다 이곳 땅값이 훨씬 비쌌어요. 아버님이 퇴직하신 뒤 생활을 위해 방 열한칸짜리 한옥을 짓고 여관으로 등록했죠. 우림여관이라고 이 근처에서는 처음 생긴 숙박업소였어요.”

당시 경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 내) 근처여서 정치인들과 중앙정부 공무원들이 이 집을 많이 이용했다. 한때는 단체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주방장 2명을 고용할 정도로 붐볐다.

“1960년대 공화당, 신민당 사람들 대구 내려오면 우리집에 많이 왔어요. 청와대 수행원들도 오고 한국은행, 중앙청 손님들이 늘 들락거렸죠. 대통령 비서실장, 신민당 총재도 오셨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때 대구 오시면 만경관 근처 청소원에서 주무셨어요. 청소원 사장님이 박 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셨죠.”

여관은 10년이 지나지 않아 문을 닫고 월세집으로 바뀌었다. 대구에 호텔들이 들어서고 진골목 인근에도 여관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영업이 신통찮아지자 폐업하고 만 것. 하지만 월세도 아무에게나 놓지는 않았다. 김씨와 어머니에게 두 번 면접을 거쳐야 했다.

이후 월세집까지 그만두고 집은 방 8칸짜리로 개조됐다. “집이 40년 가까이 되니까 비가 자꾸 새서 골기와를 벗겨내고 시멘트 기와로 바꾼 지 10년쯤 됐어요. 아래채는 아예 기와를 걷었어요. 옛날 한옥이 훨씬 좋았는데….”

◆오스카 양장점 드레스에 고려예식장서 결혼

부친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모친이 경북여고를 나왔을 정도로 집안의 경제력이 좋았던 김씨는 어릴 때부터 성악에 소질이 있어 개인 교습까지 받았다.

“클 때는 부잣집인지도 몰랐어요. 집에 피아노가 있었고, 성악 개인지도를 받았는데 보통 그런가 했죠. 연세대 입학 추천을 받고 면접을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눈이 나빠졌어요. 쓰러졌다가 눈 뜨면 중환자실이었죠.”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 시력을 잃음에 따라 그녀의 인생도 크게 달라졌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한 것. 슬픔과 충격 속에서도 결혼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웠다.

“그때 처녀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았던 분홍색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시댁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어요. 시내에 일류 양장점이 여럿 있었는데 저는 세기사하고 오스카 단골이었죠. 양장점 디자이너들이 서울대 나오고 외국까지 갔다온 사람들이었어요. 웨딩드레스는 오스카 양장점에서 맞췄는데 예식장에서 예쁘다고 하도 졸라서 팔았어요. 고려예식장, 당시에는 지은 지 몇 년 안 돼 제일 좋았죠.”

봉덕동에 신혼집을 차렸던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을 결정하고 진골목 친정으로 돌아왔다.

◆정주영 현대 회장의 전속 안마사로 2년

김씨의 집에는 요즘도 “선생님” 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잖다. 안마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다. 시력을 잃은 뒤 안마를 배운 김씨는 서울에서 2년간 수련 과정까지 거친 실력파다. 사회적 편견 때문에 모친이 반대했지만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진 김씨는 서울에서 20년 동안 일했다.

“청와대 앞에 있는 종로장에서만 20년을 보냈죠. 정치인들만 오는 유명한 집이었어요. 안마사들 학벌도 보고, 기술 시험도 쳐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때 정주영 현대 회장님과 인연이 됐어요. 오시면 저만 찾으시더니 나중에는 차를 보내서 저를 부르셨어요. 자택까지 매일 가다가 이틀에 한 번씩 가다가 했죠. 그렇게 2년을 일했어요.”

모친을 수발하기 위해 진골목에 돌아온 그녀는 이후 봉사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양로원 노인들을 자주 찾아가다 보니 침술까지 배웠다. 그녀는 별일 아니라며 가족의 내력이라고 했다.

“할아버님께서 진주서 한의사 하셨는데, 돈을 많이 버셔서 독립자금 대다가 들통이 나서 옥중에서 돌아가셨어요. 아버님도 아홉 살 때 빗자루 들고 일본 헌병에게 달려들 정도로 곧은 분이셨죠. 어머니도 틈만 나면 봉사활동을 다니셨죠. 그래서인지 우리 애들도 봉사활동 모임 열심히 합니다. 회원들 회의장소로 우리 집을 자주 쓰죠.”

진골목에 대한 김씨의 기억에는 세월의 변화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처음 이사 올 때는 골목이 참 엄숙했어요. 사는 분들도 품위가 있었고요. 그런데 1970년대 후반에 허리를 지나는 길이 뚫리면서 식당과 상점들이 들어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시대에 따라 사람들 살이가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진골목이 점점 바뀌는 건 참 안타깝습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07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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