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3>진골목 스토리…정필수 원장 | |||||||
◆죽을 것 같아야 오는 병원 “아프리카 애들 있잖아. 뼈만 앙상하니 죽도 못 먹은 것 같은 애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애들도 꼭 그랬어. 그런 애들이 며칠 동안 설사를 좍좍 하고는 축 늘어져서 오는 경우가 태반이야. 전염병이라도 돌면 환자가 몰려 하루 종일 물도 한 모금 못 먹고 일했어. 병원이 2층이고 1층이 집인데도 그랬지. 진료를 하려고 보면 죽어 있는 애들도 있었어. 몸은 뜨거운데 그새 숨을 놓은 거지. 바로 돌아서서 다른 환자를 봐야 하니 가슴 아플 새도 없었어.” 정 원장이 진골목에 정소아과 문을 열 때만 해도 대구 사람들의 삶은 팍팍함 자체였다. 설사 환자가 소아과 환자의 절반 이상이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위생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어. 내가 경북대병원 숙직할 때도 쌀이 없어서 보리국수 먹던 때였으니. 썩는 냄새만 안 나면 뭐든 먹었지. 그마저 아껴가며 먹었는데, 냉장고는커녕 벌레나 먼지 안 들게 음식 보관해둘 찬장도 변변히 없던 때였어. 배탈을 달고 살 수밖에. 그 형편에 어지간해서는 병원 근처도 못 가. 집에서 이런저런 민간처방 해 보다가, 한약방 갔다가, 숨 넘어갈 때쯤 돼야 소아과로 오는 거지. 요즘 같으면 환자 가운데 90% 이상은 곧바로 중환자실에 보내야 할 정도였어. 요새 소아과 의사들은 그런 증세 자체를 볼 기회도 잘 없을 거야.”
◆소아과 흥망성쇠 “1943년에 경대 의대 졸업하고 대학병원에 4년 넘게 근무하다가 1947년에 정소아과를 열었어. 올해 2월에 닫았으니 꼭 62년을 했네. 경대 의대 나온 사람들 중에 대구서 살기로는 내가 제일 선배야. 소아과로는 가장 오래 한 경우이기도 하고.” 대구에 처음 근대의술을 전파한 곳은 1898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개설한 시약소(施藥所)였다. 이듬해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 범위를 넓혔는데 동산병원의 전신이다. 대구에 처음 개인병원을 연 한국인은 이재영씨로 1910년대에 만경관 건너편에 구세(救世)병원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이후 도심에 개인의원이 하나둘 들어섰는데 해방 이후 대구에 60여명의 개업의가 활동한 것으로 정 원장은 기억했다. “반월당 부근에 대산소아과, 대안동에 호동소아과가 있었는데 원장 두 분이 다 경대 의대 선배였어. 당시에는 최고로 잘 되던 소아과였지. 대학병원 안 가고 모두들 소아과로 왔어. 하루 환자가 200~300명이나 됐으니 대단했지. 광고 한 번 낸 적 없어도 환자는 밀려들었어. 참 많이 힘들었지만 보람도 컸지. 요즘 같으면 중환자실 가도 안 될 애들 여럿 살린 것 같아.” 위생이나 의료에 대한 인식이 개선됨에 따라 소아과 환자도 점차 늘어났지만, 도심은 점점 비어가는 현실이었다. 대구시 영역이 넓어지는 방향으로 소아과가 가장 먼저 따라갔다. “어린애 키우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집값 싼 데로 갈 수밖에 없잖아.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다 보니 소아과 오는 사람도 점점 줄었어. 나이 먹는 만큼 환자가 줄더니 이젠 손자 손녀 데리고 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 어쩌다 오는 환자도 도심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옛날에 오던 사람들이었지. 건강 관리하고 소일 삼아 문을 열었는데 그마저도 힘들어서 닫은 거야.”
◆진골목과 병원 건물 정소아과 건물은 1937년에 지어진 벽돌조 2층 양옥이다. 근대건축물 가운데 양옥 주택은 거의 남지 않아 당시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634㎡의 넓은 대지에 히말라야시더가 심어진 정원, 별채가 2층 양옥과 잘 어울려 있다. 집을 돋우지 않고 지어서 처음에는 마당이 인근 도랑보다 낮았다. 비만 오면 물이 찼고 베란다에 물이 새기도 했지만 원형은 거의 보존돼 있다. “1·4후퇴 때 서울 사람들이 많이 왔어. 대구 사람들은 전문의가 뭔지도 모르던 때였지만 서울 사람들은 대구로 피난 와 셋방 살면서도 전문의를 찾았지. 집주인인 대구 사람이 세든 서울 사람 소개로 소아과에 오던 시절이었어. 그때 서울의 대학에서 건축과 교수 한다는 양반이 왔는데 첫 마디가 ‘이 집 절대로 고치지 마세요’였어. 한눈에 집의 가치를 알아봤다는 거야. 그러잖아도 잘 지은 건물이어서 고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어. 설계나 시공이 잘 돼 있어서 고칠 것도 별로 없었지. 그렇게 지금까지 지내온 거야.” 정 원장의 기억 속에 1940년대 대구 도심은 진골목 쪽과 동성로 쪽으로 나눠져 있었다. 지금과 달리 땅값보다 건물값이 더 중요했던 당시 기준으로는 진골목 쪽이 훨씬 가치가 높았다. “진골목은 중앙통보다 집값이 훨씬 비쌌어. 진골목은 예전부터 우리나라 부자들이 살던 동네라 건물들이 하나같이 200평 넘는 것들이었지. 진골목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씨 저택은 1천평이 넘었지. 진골목 저쪽에 진골목식당, 종로숯불갈비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서병원씨 저택이었는데 700평이나 됐어. 중앙통 쪽은 일본인들이 살던 곳이라 크게 비싸진 않았어. 전쟁 나고는 동성로와 중앙통에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어.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을 불하받기 위해 많이들 싸웠지. 관심이 건물 차지하는 데 있으니 사람은 복작거렸지만 상권은 거의 없었지. 이젠 정반대가 됐구먼.”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09년 07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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