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도심] <9>종로스토리‥④ 4대를 이은 지물상회 | |||||||||||||||||||||||
◆한강 이남 최고(最古) 지물포 종로와 약전골목이 만나는 네거리의 한 점포. 자그마한 글씨가 눈길을 끌어당긴다. ‘SINCE 1907’ 100년이 넘은 가게다. 대구지물상회.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지물포(紙物鋪) 금난지업사가 생긴 게 1904년이고, 잘 알려진 경성지물포는 대구지물상회보다 1년이 늦다. 창업자인 김농춘 선생과 아들에 이어 방계로 1979년에 지물상회를 물려받은 김종대(64)씨. 그 역시 현역에서 물러나 아들에게 물려줬으니 4대째 가업이 이어진 셈이다. “한 대는 보통 30년이라고 하지. 내가 1996년에 큰아들에게 물려줬으니 3대 90년 만에 4대로 넘어간 거야.” 대구지물상회는 한강 이남 종이 역사의 변천을 그대로 보여준다. 창업 후 대구지물포는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대구지물상회에서 일하다 뒷날 대동지업사를 연 권석규씨의 아들 권원순(미술평론가)씨는 “대구지물상회에서 대외 거래를 담당한 아버님은 경상도와 전라도, 평안도는 물론 신의주 건너 중국 단둥까지 거래를 하러 다니셨다”고 했다. 중국 선비들은 조선의 한지에 글씨를 써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로 한지의 인기가 높을 때였다. 특히 햇볕이 좋은 경상도의 닥나무로 만든 한지는 최고급품이라 중국까지 명성을 날렸다. 한지는 가정에서 생산해 시장을 통해 지물포에 공급됐다. 경상도에서 종이 생산을 많이 한 곳은 경북의 영덕과 산내, 칠곡 등이었고, 경남 의령과 거창, 함양에서도 많은 양을 생산했다. “한지를 만드는 집들은 장날 소달구지에 종이를 싣고 오지. 장터에서 등급을 매기고 몽땅 사들이는 거야. 장터 가는 곳마다 2천장 묶음 수백 동이를 구입했으니 대단한 양이었어.” 김종대씨는 1980년대까지도 한지를 구입하러 장터를 다녔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우리 점포에 담뱃대를 든 어르신들이 드나들었어. 한지 도매를 하던 분들이 많았고, 한지를 대량으로 사 가기 위해 오신 분도 많았지.”
◆귀하디 귀한 종이 서양에서 펄프로 만든 종이가 수입된 이후 종이는 흔해졌지만 닥나무로 만든 한지만 사용되던 시절에는 종이가 대단히 귀했다. 하지만 일반 가정에서도 반드시 한지를 써야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사성을 쓰고, 족보를 만들고, 도배를 하는 데는 꼭 한지가 있어야 하지. 그래서 1980년대까지도 쌀과 고무신, 종이에 붙는 세금이 가장 낮았어. 그만큼 생활필수품으로 취급된 거야.” 사성(四星)이란 결혼 때 신랑이 태어난 해와 월, 일과 시를 적어 보내는 간지(簡紙)를 말한다. 이는 곧 혼인의 증표다. “예전에는 멀쩡한 부부 사이인데도 주위에서 사통한다고 관가에 일러바치는 일이 많았다고 해. 호적이 없던 시절에는 부부 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자칫하면 곤장을 맞고 반병신이 됐어. 이때 ‘이 사람이 내 남편이오’ 하며 보여주는 게 사성이지. 그래서 아낙네들은 사성을 집안 깊숙한 곳에 잘 숨겨뒀어.” 족보 역시 기록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집안과 신분을 나타내는 증표로 사용됐으니 집집마다 족보는 두고 살았다. 종이로 벽을 바르는 도배는 대구지물포를 한강 이남 최대의 지물포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산은 개항을 하고 무역과 상업이 활발했지만 종이는 크게 다루지 않았어. 항구도시다 보니 습기가 많아 벽에는 도배를 하지 않고 칠을 했어. 그러니 대구가 종이의 집산지가 된 거지.” 대구지물상회가 번성할 때는 약전골목도 흥했다고 한다. 약을 쌀 때, 약탕기를 덮을 때 쓰는 한지도 함께 잘 팔렸다. “요즘 한약은 달여서 비닐봉지에 담아 주지만 예전에는 약탕기에 부채질을 하면서 달였지. 한지는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약탕기를 덮는데 그만이지. 약을 쌀 때 한지를 이용하는 것도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하기 위해서야. 지물포가 약전골목에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거지.” 1960년대 종로에 가구점이 50개 넘게 생겼을 때도 지물포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많이 팔리던 자개농에 자개를 붙이는 데 한지가 쓰였기 때문이다.
◆가업(家業) 100년 대구지물상회의 테이블에는 한 유명 벽지회사 광고지가 붙어 있었다.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벽지는 가업 백년을 이어온 대구지물상회가 보증합니다’라는 문구 옆에 김씨 부자의 사진이 보였다. “벽지회사에서 60주년 기념 광고물을 만드는데 다른 모델을 쓰려고 했다가 창업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해. 고객들에게 신뢰를 주려면 신뢰 있는 모델을 써야 한다며 대구지물상회로 달려가라고 말이야.” 김씨는 1979년에 점포를 물려받았지만 그 전에도 다른 곳에서 종이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창업자 직계에 물려받을 후손이 없어 자신이 맡았다는 것. “몇십년을 하다 보니 힘들기도 하고, 서양 종이가 흔해져서 장사도 예전 같잖고 해서 그만 두려고 했어. 아들에게는 1년 동안 생각해보라며 시간을 줬어. 그랬더니 대학을 졸업한 뒤 점포를 맡겠다는 거야. 싫다고 하면 내 대에서 문을 닫을 생각이었지.” 아들 김수효씨가 점포를 맡으면서 지금은 한지뿐만 아니라 장판과 버티칼, 인테리어 제품까지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도 날마다 가게에 나와 자리를 지킨다. 아들을 못 믿어서도, 더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랜 고객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담수회를 비롯해 수십 년째 우리 집을 찾는 유림과 향교 어른들을 모시기 위해 나오는 거지. 그분들 오시면 차도 대접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해드려야 하거든. 그분들 사 가시는 종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역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찾아오시는데 마땅히 대접해야지.” 한지는 보관성 측면에서 서양 종이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 오래 보관돼야 할 자료들은 한지에 남기는 게 바람직하다. 종로와 약전골목의 쇠락과 함께 조금씩 기울고 있지만 대구지물상회는 단순한 종이가게가 아니라 대구경북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하고 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09년 08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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