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도심] <10>종로스토리‥⑤ 거리 변천사 -090903-

思美 2010. 4. 1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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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도심] <10>종로스토리‥⑤ 거리 변천사
 
일제시대 기생들은 3년짜리 권번에서 기예를 배운 뒤 공연을 통해 수입을 올리던 연예인이었다. 20세기 초 기생들의 나들이 모습.
 
1970년대 종로는 가구거리로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함께 모여든 금고상들은 가구점들이 거의 떠나간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때 화교거리로까지 불리던 종로에는 지금 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 중국음식점 몇 곳만 남았다. 사진은 화교소학교 입구
 
몇년 사이 종로에는 전통차와 다기 등을 취급하는 점포가 크게 늘어 전통거리로 되살아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역사는 기록하는 사가(史家)를 두고 사실(事實)들끼리 벌이는 생존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선택받기만 하면 사실(史實)로 대접받지만 버려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실체가 있는 증거품이나 기록물을 남기기 어려운 거리의 일들은 선택 측면에서 불리하다. 그만큼 역사로 살아남기 어렵다. 종로 역시 근대 이후 여러 차례 모습을 바꾸며 대구의 변화상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비췄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찾아내고 보존하는 일, 오늘날의 일과 연결해 살아 있는 역사로 만드는 노력이 시급하다.

◆요정과 기생의 거리

대구읍성이 무너진 뒤 종로는 중심 통로로서의 기능을 점차 잃어갔다. 신작로가 뚫리긴 했지만 일제의 요구에 따라 경상감영 앞을 동서로 지나는 거리에 관청과 금융기관 등이 속속 들어서며 세를 조금씩 뺏겼다. 대신 종로에서 향촌동에 이르는 거리에는 요정들이 들어와 대구의 밤 문화를 지배했다. 평생을 종로 일대에서 살아온 미술평론가 권원순씨는 “종로와 수동, 상서동 일대에만 요정이 20개를 넘었고 수백명의 기생들이 드나들어 1960년대 후반까지도 불야성을 이뤘다”고 기억했다. 춘앵각, 일심관, 은성, 석빈, 백록, 고운, 다정 등 유명 요정들은 1970년대 이후까지도 명맥을 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기생들은 여러 면에서 일반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3년제 기생 양성학교인 권번을 졸업해야만 요정에서 돈을 벌 수 있었으니, 일종의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다. 권번에서 배우는 과목은 무용, 기악과 함께 서예와 교양 등 4개 분야. 전문 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대구의 경우 관에서 허락한 권번 1개와 사설 권번 4, 5개가 있었다.

학비는 1930년대를 기준으로 보면 한달에 1원50전 정도였다. 대부분 빈농이나 도시 영세민의 딸인 학생들에겐 큰 부담이었지만 졸업장을 따기만 하면 돈벌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기생들의 봉사료는 시간당 무려 2원. 일주일만 일하면 3년 동안의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1등부터 10등까지는 졸업과 동시에 경찰서에서 허가증을 받고 요정에서 일을 시작했다. 30등까지는 3개월, 그 이하는 6개월을 기다려야 허가증을 받을 수 있었다.

기생들이 손님 앞에서 하는 일은 창과 가야금, 시조 등을 공연하는 게 전부였다. 돈벌이 못지않게 지조도 유명했다. 일본인 손님 앞에서도 일어를 쓰는 법이 없었고, 지나치게 고고한 자세를 지키다 다툼이 일어나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고종 국상 때는 권번에서 소복을 입도록 해 모든 기생들이 소복을 입었다가 일본 경찰에게 문초를 받기도 했다.

종로 거리에는 당연히 기생들과 관련된 업종들이 흥했다. 1920년대 대구에 20여대 있던 인력거는 대구역 아니면 모두 종로에 진을 쳤다. 중앙로에 들어선 택시회사의 단골 고객도 기생들이었다. 기생들을 상대하는 세탁소도 여럿 있었다.

◆화교거리에서 가구거리로

20세기 들어 대구에 들어온 화교들은 명성에 맞게 상업의 중심지인 종로를 택했다. 일본인들이 대구역을 중심으로 북성로 일대에 자리를 먼저 잡은 탓도 있지만 요정들이 번성하고 약전골목과 만나는 종로는 화교들이 정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들은 식당과 한의원, 상업을 통해 세를 불렸고 1960년대까지 종로의 핵심적인 상권을 차지했다.

1950년대 5천명을 넘기도 했던 대구 화교들은 이후 우리 정부의 왜곡된 외국인 정책으로 인해 대만, 미국 등으로 하나 둘 떠났다. 1968년 최대 중국 음식점 중 하나인 군방각이 헐린 일은 화교거리라는 이름이 빛을 잃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화교들에 이어 종로 상권을 장악한 것은 가구상들이었다. 목공소와 농방 등 소규모 점포 5, 6개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한 가구거리의 면모는 1950년대 후반 ‘가구사’란 간판들이 잇따라 내걸리면서 일반인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꾸준히 가구점이 늘어 1970년대 초에는 만경관 네거리~염매시장 입구 거리에 50개가 넘는 가구점, 공예사가 있었다.

권원순씨는 “가전제품이 흔해지기 전에는 결혼 때 자개농이 가장 큰 혼수”라며 “자개농을 사든 원목장롱을 사든 가구를 사려면 종로에 와야 했다”고 말했다. 가구점 사이에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가격도 손님이 부르는 데 따라 정해지기 일쑤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내가 결혼할 때도 자개농을 종로에서 샀어요. 주인이 300만원 부르기에 조르고 졸라서 200만원까지 깎았지요. 집에 와서 말씀드렸더니 아버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다시 가구점으로 가 50만원을 더 깎았어요. 투덜거리면서도 ‘또 오세요’ 하는 걸 보고 기가 막혔는데 주인 말이 ‘종로 가구거리 이름 듣고 시골서 오는 사람들한테 장롱 팔아 먹고 산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종로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가구상들이 번성하자 철물점과 금고상 등 관련 업종까지 함께 모여들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유통망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대형 가구기업들이 밀고 내려오자 가구상들도 결국 종로의 주인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2대에 걸쳐 한일금고를 운영하고 있는 이무형씨는 “1970년대 중반에 대구시내 금고상이 모두 종로에 모여들 때만 해도 종로는 온통 가구점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외곽지로 떠나고 공예사 몇 곳과 금고상들만 남았다”고 말했다.

◆되살아나는 전통거리

가구상들이 떠난 뒤 종로는 한동안 침체에 빠졌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면모가 새로워지고 있다. 전통차와 다기, 천연염색, 골동품 등을 취급하는 점포들이 들어오면서 전통거리로 주목받고 있는 것. 관련 점포가 벌써 20개를 넘었고, 입점을 문의하는 이들도 상당수라고 한다. 실제로 종로의 전통차와 다기점 등에는 대구 시민들보다 오히려 경상남북도와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더 많을 정도다.

다기 판매점 다소원을 운영하는 김정제씨는 “서울에 인사동이 있다면 대구에 종로가 있다고 할 정도로 몇 년 사이 유명해졌다”며 “인사동은 최근 명성을 잃어가고 있지만 종로는 경상남북도에 산재한 도요들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대부분 모이고 있어 더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종로의 변화는 앞으로가 더욱 주목된다. 종로와 진골목 일대를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려는 중구청의 계획이 올해 국토해양부의 시범사업에 선정된 데다 구상 단계부터 종로 일대의 역사문화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구청이 기본구상과 실시설계 단계에 역사 및 스토리 계획팀을 구성한 것부터 획기적인 발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단순한 시설 개선과 디자인만으로 도심 경쟁력을 높이는 시대는 지났다”며 “종로는 대구의 역사를 담고 있는데다 현재 변화도 그에 걸맞게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 대구의 역사문화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거리로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09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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