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김나형 김천시 직원-(6)마당 깊은 집 | |||||||||||
◆대구와 마당 깊은 집 김원일씨는 경남 김해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4년 대구로 왔다. 군대를 다녀오고 영남대를 졸업한 1968년까지 중구 일대에서 예닐곱 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 40년도 더 지났지만 그는 이사다니며 살던 집들의 구조와 형태, 처마 모양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장관동은 대체로 한두 가구의 피란민이 문간방이나 곁채, 아래채에 세를 들어 살았다. 우리 식구가 살던 네 평이 채 안 되는, 어머니 표현대로 분갑만한 방은 아래채 가장 끝방으로, 변소에서 시작되는 수채 겸한 개골창이 집 가장자리로 흘러 늘 퀴퀴한 냄새가 들창으로 스며들었다.(중략) 그러나 대구 변두리 야산을 뭉개고 피란민이 마구잡이로 판잣집이나 거적집을 지어 하수구나 변소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허리 숙여 들랑거리는 날림집에 비한다면, 마당깊은 집 셋방이야말로 사람 살 만한 터라 아니할 수 없었다.’(소설 ‘마당 깊은 집’ 중에서) 이사 와서 처음 살게 된 집의 주인은 기생들을 관리하는 여자였다. “당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자유부인’ 책을 읽고 있었어요. 수동과 하서동에 요정이 많았는데 기생들은 요즘 돈으로 하루 100만원 넘게 벌었습니다. 전쟁 후 어두운 시절이라 장관이나 국회의원, 부자들이 돈을 뿌려댔죠. 기생들은 홍콩에서 들여온 최고급 비단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집주인이 기생들의 옷 바느질감을 줬어요. 어머니 솜씨가 소문 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지만 워낙 아끼는 성격이라 생활은 팍팍했습니다.” ‘대구 중심부 종로통에서 어머님은 기생옷 바느질일로 식생활을 해결하고 우리 4남매를 교육시켰다. 단칸 셋방살이는 몇 년 동안 계속되었고, 내 집을 가질 때까지 악착같이 일을 해야 한다며 어머님은 꼭두새벽부터 자정까지 재봉틀 앞에서 쉴 짬 없이 일하셨다.’(김원일 에세이 ‘재봉틀에 관한 일화’ 중에서)
◆종로에 대한 기억 작가의 기억력은 비범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김씨는 지나는 곳마다 옛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특히 종로에 얽힌 기억들이 흥미로웠다. “종로 중간쯤에 목욕탕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씩 동생들과 목욕탕에 다녀오게 했습니다. 남탕과 여탕은 칸막이만 쳐 있지 위는 뚫려 있고, 온탕을 같은 물로 썼어요. 탕에는 늘 때가 둥둥 떠다녔는데 종업원이 가끔씩 와서 건져냈습니다. 그렇게 땟국이 넘쳐도 따뜻해서 좋다며 동네 사람들은 수채로 나가는 목욕탕 물에 빨래를 했습니다.” 중년 이상의 대구 사람이라면 중국 음식점과 자장면에 대한 사연 한둘쯤은 갖고 있을 터. 김씨 역시 종로에 있던 당시 최대 중국 음식점 ‘군방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군방각에서는 부잣집 회갑잔치 같은 게 자주 열렸어요. 종로 일대에서 10년 넘게 살았지만 딱 한 번밖에 못 가봤죠. 집안 어른 회갑 때였어요. 울산서 온 삼촌이 잔칫상에 남은 음식을 몽땅 집에 싸 와서 밤새 먹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튿날 아침 배탈이 나서 고생을 했습니다. 음식이라고 하면 탈이 나든 말든 먹고 보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평소 군방각 지나는 길은 고행의 길이었다. ‘긴 골목을 빠져나가 종로통 중간쯤에 대구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중국 요릿집 군방각이 있었다. 그 건너에 있는 중국인 학교까지는 마당 깊은 집에서 삼백 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명령했으니 물 길어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을 안 하면 밥을 굶길 터이므로 나는 물지게를 빌려 이모님 댁으로 갔다.’(소설 중에서) 진골목을 지나던 김씨는 정소아과 간판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난듯 무릎을 쳤다. “정소아과 덕분에 죽기 직전에 살아난 일이 있어요. 고2 때였는데 독감에 걸렸지만 변변히 약도 쓰지 않고 방치했죠. 그러다 내장이 완전히 꼬여버렸어요. 대봉동 학교에서 친구에게 업혀 정소아과에 갔는데 원장님이 하루만 늦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했어요. 3일을 꼬박 굶고 일주일 동안 미음을 먹고서야 겨우 일어났습니다.”
◆도심 골목과 문화를 살려야 대구 도심에 대한 기억으로 소설을 써낸 작가답게 그는 도심 보존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중국 베이징 관광객이라면 과연 어디를 찾겠습니까. 새로 지은 빌딩일까요, 옛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일까요. 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남에서 제일 큰 도시, 제일 오래 된 도시라는 역사를 부각시켜야 해요. 초라해 보여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대구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호남의 경우 문화에 긍지를 갖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대가도 아니고 죽은 사람도 아닌데 이름이 조금만 알려지면 생가나 기념관 같은 걸 만들려고 합니다. 소설가 이청준씨가 돌아가셨을 때 고향 장흥에서 군수를 비롯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추모하러 온 걸 봤습니다. 대구라면 과연 그럴까요. 군산의 경우 모든 교사들이 채만식 체험을 해야 합니다. 채만식에 대해 알아야 군산 시민이라는 분위기가 정착돼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대구는 정치만 있고 문화는 없는 것 같아요. 도시 분위기가 권력지향적인 느낌입니다. 근래 경상도에서 큰 작가가 나오지 않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겁니다.” 마당 깊은 집 테마화 사업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장관동에 한옥을 하나 구해서 아래채는 관람과 체험 공간으로 하고, 위채는 도서관으로 만들면 좋겠어요. 도서관에는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 2천권 정도를 기증하겠습니다. 자필 원고를 비롯해 필요로 하는 모든 걸 내놓을 생각입니다. 집은 1950년대 대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대문을 열고 중문을 지나면 계단 너덧 개쯤 내려와야 마당을 밟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어요.”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09년 09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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