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2)동산 스토리-(1)동산의료원 -090917-

思美 2010. 4. 1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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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2)동산 스토리-(1)동산의료원
▲서문시장 쪽 상공에서 내려다본 동산의 모습. 사진 왼쪽 위가 대구 도심이다.
 
▲동산에 보존된 종탑. 동산의료원 담장 허물기 사업을 하면서 철거한 정문과 중문 기둥, 담장 일부를 옮겨 세우고 초창기 개척교회의 종틀 중 하나를 올렸다.
큰장(서문시장)과 읍성 사이 동산이 조그맣게 올라서 있다. 마을 부근의 작은 산을 말하는 동산이 아니다. 동쪽에 있는 산이다. 경상감영 남쪽의 산을 남산(南山)이라 부르는 데 맞추면 서산(西山)이 맞지만 이름은 분명 동산이다. 경상감영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불려온 이름이란 뜻. 대구의 오랜 중심이었던 달성토성에서 보면 동쪽 산이다.

◆城內 제중원 열악한 환경 바꾸려 이전

20세기 이전 동산은 나무도 그리 많지 않은 헐벗은 산이었다. 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와 동산병원을 세운 존슨이 1898, 1899년 성문 밖 동산 서쪽의 넓은 땅을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사들이면서 동산은 완전히 모습을 바꾸게 된다. 이들이 동산을 주목한 것은 당시 제중원(동산병원 전신)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 제중원은 7m 높이의 성벽 안쪽 가까이에 있어서 통풍이 잘 되지 않았다. 좁고 천장이 낮아 존슨이 “의사가 자기 건강의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일할 수 없는 곳”이라 토로하기도 했다. 주위에는 민가가 밀집돼 악취와 굴뚝 연기가 심하고 개 짖는 소리, 빨랫방망이 소리, 무당 굿하는 소리 등 소음도 대단했다고 한다. 동산은 이런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적지였다.

‘이 땅은 양쪽 언덕 끝이 시가지와 접해 있는 고지대였다. 그래서 냄새와 소음과 연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고, 공기는 맑았으며 전망 또한 좋았다. 언덕 밑에 산신령이 살고 있다는 큰 고목나무를 빼놓고는 모든 땅이 헐벗은 황무지였다.’(동산의료원 100년사)

이들은 동산에 병원과 선교사 주택, 정원 등을 차례차례 지어갔다. 황무지 동산이 근대건축의 보고로 바뀌는 시기였다.

‘명치정(계산동) 남쪽 미국인이 사는 십수 채의 양옥이 우뚝 솟은 언덕을 동산이라 하는데 1904, 1905년에는 일본인의 요릿집이 한 채 있어서 동산루(東山樓)라 하였다. 현재의 대구 지형으로 보면 차라리 서산이라 할 위치를 동산이라 하니 미심쩍게 들릴지도 모르나 읍지에서 그 시대의 대구를 본다면 바로 동산이었음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가와이 아사오, 대구이야기)

현재 동산에 올라 보면 의료박물관, 선교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 3`1운동 기념관 등 대구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시설들이 여럿 있다. 하나같이 당시 지어진 건축물들을 활용한 것으로,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도심에서 가까운 위치에 얕은 구릉과 갖가지 나무들, 멋스런 근대건축물들이 어울린 풍경은 전국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자녀와 함께, 연인과 함께 거닐기에 딱 좋다.

◆20세기 초 대구의 위생상태

20세기를 전후해 대구는 도시화의 길로 접어든다. 도시화를 다른 측면에서 보자. 사람이 늘면 가장 먼저 쌓이는 것이 오물이다. 사람들이 배출하는 분뇨의 양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구에 처음 하수도 시설을 한 것이 1913년 2`28기념공원 앞으로 450m 도로를 내면서였으니, 이전에는 자연하천을 통한 처리밖에 없었다. 대구 시내를 흐르는 달서천은 유용한 하수도였으나 건기나 겨울철에는 기능을 잃고 오물을 쌓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천 바닥은 점차 높아졌고, 결국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범람하는 지경이 됐다. 1917년의 대대적인 달서천 개수공사도 사람이 버린 퇴적물들을 파내는 일이었다.

‘도둑 지키기보다는 식용 또는 어린애의 뒤 청소를 하기 위해 개를 기르는 것 같았다. 뒤 청소라 함은 어린애가 세살 정도 되면 개 쪽으로 궁둥이를 돌리고 뒤를 보게 한다. 그러면 개가 와서 다 먹어 치운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어느 집 여주인이 개를 온돌 방안으로 불러들여서 아이의 뒤를 먹게 하였는데 어두운 방안에서 그만 어린애의 불알까지 먹어버렸다는 설화다.’

1905년 일본인 가와이 아사오가 본 대구의 모습이다. 그의 시각에는 다분히 한국인에 대한 비하가 깔려 있으나 사실과 크게 동떨어진 얘기는 아니었다. 집집마다 개와 돼지를 키우는 게 보통이었다. 개가 없는 집은 찾기 힘들었고, 돼지를 10마리 이상씩 키우는 집도 적잖았다. 돼지는 살아서 사람의 분뇨를 처리하고, 죽어서 식용으로 쓰였으니 사람에겐 참으로 고마운 동물이었다. 문제는 안이 훤히 보이는 담장 아래에 화장실을 두었다는 것. 외부로 노출된 시설이었으니 지나는 사람이 다 보는 실정이었다. 동산 아래 계산동이 주택의 화장실을 밖으로 노출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고 한다.

위생관념이 이런 시기였으니 의료 현실 역시 전근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서양인 의사인 존슨의 눈에 비친 대구의 환경은 오늘날 우리가 아프리카나 남미의 원주민들을 보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질병을 일으키는 나쁜 귀신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어서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으로 믿고 그 귀신들을 무서워한다는 데 놀랐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천연두에 걸려서 살아남을 때까지는 이름을 짓지 않거나 식구 수에 넣지 않았으며, 천연두를 중국에서 온 나쁜 귀신이 몸속에 들어와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열병을 치료할 때 흔히 말린 두꺼비나 뱀을 달여 먹었고, 몸이 허약한 경우에는 호랑이 치아를 갈아 만든 가루약이 특효라 믿었다.’(동산의료원 100년사)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0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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