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3)동산 스토리-(2)서양 의술의 도입 -090924-

思美 2010. 4. 1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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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3)동산 스토리-(2)서양 의술의 도입
조선 말엽까지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료기관은 서울에 몰려 있었고, 지방은 찬밥 신세였다. 탕약과 침으로 병을 다스리던 전통한의학이 있었지만 민중들에게는 그마저도 그림의 떡이었다. 오랜 경험으로 내려온 민간 처방에 기도와 주술을 더하는 수준이었으니 자연의 순리가 최고의 치료요법이었다.

문호 개방과 함께 밀려든 서양인들은 선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목적으로 의술을 전했다. 일반인을 위한 의료기관이 생긴 것도, 지방에 근대 의술이 전파된 것도 이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지방에는 돌팔이 천지

우리가 흔히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의료기관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존재했다. 조선 건국 후 서울에는 여러 국립의료기관이 등장했다. 궁궐에 내약방, 궁궐 가까이에 전의감, 도성 안에 혜민국, 도성 밖에 대비원이 들어섰다. 의술 수준은 궁궐에서 멀어질수록 떨어지는 구조였다. 지방까지는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왕실이 지방 사람을 위해 만든 의료기관이라야 제생원 정도였다. 이는 지방에 만든 게 아니라 조선 건국 초기 서울에서 벌어지는 토목공사에 동원한 지방 장정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에 만든 것이다. 그마저 서울의 대형 토목공사가 마무리된 세조 때 없어졌다.

아픈 지방 사람들이 서울까지는 갈 수 없는 노릇. 한의원이나 한약방조차 부담스러운 민중들에게 반가운 이는 돌팔이 의사였다. 돌팔이라는 이름 그대로 전문적인 실력이나 자격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들이니 실력 없음이 들통나면 밤사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게 보통이었다.

대구에 제중원을 연 존슨은 개원 초기 기가 막힌 일을 경험한다. ‘어느 날 폐결핵 환자의 남편이 하얀 실 같은 뼈를 갖고 왔다. 폐결핵을 전문으로 고친다는 여자 돌팔이가 아내의 몸에서 뽑아낸 것이라고 했다. 돌팔이는 환자의 머리나 등뼈를 마사지한 후에 족집게를 가지고 1인치 정도 길이의 뼈를 뽑아냈다고 했다. 현미경으로 조사해 보니 청어 지느러미뼈였다.’

◆양귀(洋鬼)가 연 미국약방

서울에 민중을 위한 의료시설이 다시 생긴 것은 1885년. 제생원이 혜민국으로 흡수된 지 400년 만이다. 당시 미국 공사관 부속 의사인 앨런은 갑신정변 때 칼을 맞은 민영익을 치료해준 공로로 왕을 접견하고 의료기관 개설을 건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광혜원으로, 이름은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바뀌었다.

제중원(濟衆院)이라는 같은 이름의 근대 의료기관이 대구에 생긴 것은 14년 뒤인 1899년이다. 앨런과 마찬가지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소속인 의사 존슨(Woodbridge. O. Johnson, 張仁車)은 1898년 대구에 부임하자 남성로에 시약소(施藥所)를 개설했다. 당시 간판은 ‘미국약방’이었다. 코 큰 서양인을 ‘양귀’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시절인 만큼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시약소 개설 당시 기독교 신자는 2명뿐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병원 전도사로 활동한 서자명씨였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상투를 자르고, 개화인 행세를 한다 하여 달성 서씨 문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고 한다.

이듬해 제중원이라는 병원 간판이 내걸리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진단이나 치료를 위한 게 아니라 서양인과 서양 의술이 어떤 모양인지 보려는 구경꾼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와서 울타리를 쳤을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서양 의술의 결과들이 소문나면서 제중원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대구 외곽에서 달구지를 타고 오는 환자들도 적잖았다. 그 덕에 대구의 기독교인은 1910년 1만3천명에 이를 정도로 증가했다.

◆늘어나는 병원들

1907년 동문동에 동인의원이 세워졌다. 대구에 사는 일본인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일본인들이 세운 병원이다. 1910년 합방이 되자 총독부는 동인의원을 대구자혜의원으로 바꾸었다. 각 도에 설치한 식민지 초기 병원의 이름을 자혜의원으로 통일한 것이다. 자혜의원은 1925년 경북도립 대구의원이 됐고, 이것이 경북대병원의 전신이다.

1914년에는 대구부가 되면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남산동에 전염병 격리병사(病舍)가 설립됐다. 대구의료원의 기원이다. 서양식 개인병원도 하나 둘 생겼다. 구세병원이 처음이고 호생당, 남산병원, 순천당병원, 중앙병원, 약산병원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인으로 대구에 최초로 개인병원을 개설한 사람은 이재영씨로 만경관 맞은편에 구세(救世)병원을 개업했다. 정확한 개업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세브란스 의전 4회 졸업생이었던 점, 세브란스 의전이 첫 졸업생을 배출한 것이 1908년인 점을 감안하면 1912년 정도로 추정된다.’(매일신문 1981년 7월 16일자)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0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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