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7>종로 스토리(2)건축과 상업으로 뿌리내린 화교 | |||||||||||||||||
계산성당, 제일교회, 구세군교회, 화교협회, 정소아과…. 해방 이전 대구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 가운데 상당수는 중국인 건축가들의 솜씨다. 종교건축에서부터 주택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의 손이 닿으면 붉은 벽돌의 견고한 서양식 건축물이 됐다. 건축기술자로 대구에 이주해 전국적인 명성의 화교 사업가가 된 모문금(慕文錦)의 생애를 통해 대구 화교들의 변천을 짚어 보자.
◆중국 건축 대구에 자리 잡다 1913년 청년 모문금은 자신의 건축 스승이자 동업자인 강의관(姜義寬)과 함께 대구에 첫발을 디뎠다. 대구대교구 초대 주교인 드망주(안세화) 주교가 베이징 관구에 건축기술자 파견을 요청한 데 따른 것. 그들은 신도 서상돈으로부터 기증받은 남산동 3만3천㎡(1만여평)의 부지에 성유스티노신학교를 건축했다. ‘중국인 건축기술자들은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일에 충실하다. 감독자의 눈을 피해 일을 대충 하는 이가 없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단 약속한 것은 절대 어기는 법이 없고 만사에 용의주도하다.’ 기술적으로 한발 앞섰던 당시 일본인 건축가들의 기록은 중국인들의 성실함만 부각시키고 있으나, 벽돌과 석공 기술은 일본인들 못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1930년대 공업에 종사한 화교는 약 2만명으로 상업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가운데 토목, 건축 관련 종사자가 56.5%였다. 모문금 역시 기술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강의관과 함께 교구청 주교관, 성바오로수녀원, 성모당 등 종교 건축물들을 잇따라 짓는다. 그들은 남산동 가톨릭대학 구내에 벽돌공장을 두고 벽돌을 직접 제작해 사용했다. 여기서 만들어진 벽돌은 일본인들의 관공서 건축에까지 쓰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만든 건축회사 쌍흥호(雙興號)는 성장을 거듭해 1920년대 조선의 2대 화교건축회사로 부상했다. 과세표준액으로 보면 1924년 국내 중국인 건설회사 가운데 서울의 복음건축창이 10만엔으로 가장 많았고 쌍흥호가 3만엔이었다. 그 아래로는 1만엔 이하였으니 쌍흥호의 실적을 짐작할 만하다. ◆최고의 음식점 군방각 사장이 되다 1931년 중국 지린(吉林)성 완바오산(萬寶山) 지역에서 한`중 농민들 사이에 수로공사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는데 일본의 간섭으로 사건이 악화됐다. 경성일보에 사건이 확대 보도되면서 반(反)중국 감정이 폭발,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화교들을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구에서는 다행히 큰 마찰이 없었지만, 배화(排華) 감정이 커지면서 떠나가는 화교가 줄을 이었다. 강의관도 이때 중국으로 돌아갔다. 쌍흥호를 혼자 운영하게 된 모문금은 이후로도 수완을 발휘해 성요셉병원, 핸드슨관, 제일교회 종탑 등 여러 건물을 지었지만, 식당 경영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강의관과 함께 인수해 1930년 벽돌건물로 새롭게 문을 연 군방각(群芳閣)이었다. 모문금은 1960년대 후반 이를 매각해 옛 종로호텔로 바뀔 때까지 30여년을 운영하며 식사와 모임은 물론 결혼식과 환갑잔치, 연말연시 행사 등의 문화를 주도했다. ‘당시 대구의 경정(京町:지금의 종로) 일대에는 크고 작은 식당만 10여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 군방각이 규모가 가장 크고 시설도 완비됐다. 요리사도 모두 중국에서 유명한 이들을 초빙했다. 당시 대구의 기관단체, 사회명사 등 모두가 군방각의 중국 음식을 애용한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서국훈 전 대구화교소학교 교장) ◆교육의 기틀을 세우다 효(孝)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결혼한 뒤 외지에 나가 일을 해도 아내와 자식은 고향에 둔다. 집안 어른을 모시기 위해서다. 이러다 보니 1930년대 대구에 거주하는 화교가 1천명을 넘어도 학교 설립의 필요성은 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공산화와 태평양전쟁으로 가족 이주가 급증하면서 교육을 받아야 할 화교 자녀도 갑자기 많아졌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모문금이다. 그는 1941년 2월 학교 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는 한편 부산영사관을 방문해 협조를 요청했다. 이렇게 모인 돈이 6천350원이었는데 모문금은 개인 명의로 200원, 군방각과 쌍흥호 명의로 200원과 100원을 기부해 모두 500원이나 내놓았다. 대구부 첫 화교소학교는 1943년 2월 현 화교협회 건너 화상공회 건물에서 문을 열었다. 좁은 건물은 이내 수용인원을 넘어 신축 교사의 필요가 커졌다. 1948년 당시 교장이었던 모문금은 교사 신축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대구경북은 물론 전국 각지의 화교로부터 568만3천400원이 모금돼 현재 종로의 소학교 부지와 건물을 550만원에 구입했다. 모문금은 쌍흥호(52만원), 군방각(39만원) 이름으로 91만원을 기부했다. 당시 매입한 현재 화교협회 건물은 진골목 갑부 서병국씨의 집이었다. 평소 서씨와 호형호제하던 모문금이 그 건물을 건축했고, 콜레라로 서씨가 죽은 뒤 유족으로부터 사들였으니 특이한 인연이다. 대구화교소학교는 1950년대 이후 서울, 인천, 부산 화교소학교와 함께 전국 4대 소학교의 하나로 발전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대구 화교 略史>
‘대구에 처음으로 중국인이 거주한 것은 1905년경이었다. 당시 1, 2호의 중국인 상인이 재류(在留)하고 있었다.’ 192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 12개 도시를 조사해 정리한 책 ‘조선의 중국인’에는 화교의 최초 대구 거주 시기가 1905년으로 나온다. 경부철도 개설 공사를 계기로 많은 중국인 기술자와 노무자들이 대구와 경북으로 밀려들어온 결과다. 정착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에는 기념사업이 성대하게 열리기도 했다. 이주자가 아닌 일시 거주자로 중국인들이 대거 대구 땅을 밟은 것은 그 이전이다. ‘1901년 5월에 석공 14명, 목수 3명, 요리사 2명 등 중국인 건축업자 19명이 대구에 도착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서울에서 중국인 벽돌제조업자 9명이 대구에 내려왔고, 이들은 1902년 11월 25일에 공사를 마치고 철수하였다.’ 계산성당을 지은 중국인들에 대한 ‘대구본당 100년사’의 기록은 20세기 들어 활발해진 중국인들의 종교 건축 붐이 대구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1930년에 대구경북의 화교 인구는 1천384명으로 늘었다. 국내 화교 인구가 1만9천963명이었다는 조선총독부 기록에 비춰보면 적잖은 숫자다. 한국 화교의 90% 이상은 칭다오(靑島) 등의 도시가 있는 산둥(山東)성 출신이다. 대구화교협회 이세붕 상무는 “산둥성은 한국에서 코앞이라 배들이 바람을 잘못 타면 인천에 올 정도였다”며 “중국 공산화 이후 정부 주축들은 대만으로 갔지만 민간인들은 한국으로 많이 왔다”고 말했다. 화교 경제는 해방 이후 급속도로 확장된다. 미 군정의 우대를 받아 경제력을 키운 데다 한국전쟁 때 서울과 인천의 화교들이 대거 대구로 내려온 데 따른 것. 전쟁 후 중국과 국교가 단절되면서 이동할 통로를 잃은 국내 화교는 1960년대까지 안정기를 맞는다. 대구 화교 인구도 1967년에 3천108명으로 최대에 이르렀다. 1970년대 이후 대구 화교는 급격하게 쇠퇴했다. 화교 자본에 대한 국내 규제가 심해지면서 대만, 미국, 호주 등지로 대거 이주한 것. 화교들이 운영하던 양조장과 주물공장 등도 자취를 감추었고 중국식당도 거의 사라져 현재 종로에는 3곳만 영업을 하고 있다. | |||||||||||||||||
기사 작성일 : 2009년 08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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