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6> 종로 스토리 ①대구의 종소리 -090806-

思美 2010. 4. 1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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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6> 종로 스토리 ①대구의 종소리
위에서 내려다본 종로 거리. 대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면서 풍성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길이다. 아래쪽 남성로 약전골목과 만나는 곳에 영남제일관이 있었고, 종루도 그곳에 있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만들어놓은 달구벌대종. 왜 이곳에 만들었는지, 어째서 이런 모습인지 알 길이 없어 대구의 종루를 내버렸다는 씁쓸함이 앞선다.
 
현재 망우공원에 있는 영남제일관. 원형과 다르게 잘못 복원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웅장함 하나만은 대단해 보인다.
 
18세기 대구읍지에 실린 대구부의 읍성 형태.
종로는 수도 서울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계가 보급되기 전, 사람들이 시간을 인식하는 유일한 수단은 성내 한가운데서 울리는 종소리였다. 종소리가 들리는 만큼이 도시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서울의 중심에 종루가 있었다면 대구에도 읍성 남쪽에 종루가 있었다. 그 앞을 지나는 길은 서울이든 대구든 종로로 불린다. 근대의 물결과 함께 종루는 소리를 잃었지만 도시의 중심 역할은 굳건히 지켜왔다. 종로는 역사와 전통이 켜켜이 쌓인 도시의 대동맥이었다.

◆대구에도 종루가 있었다

1907년 여름 어느 날. 칠곡 사람 이서방은 아직도 대구부 성내를 지나가는 게 익숙하지 않다. 청도 우시장에서 송아지 두 마리를 사 팔조령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예전, 아니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대구부 남문인 영남제일관 밖 난전 박서방네 가게에서 오후 8시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상인들 틈에 끼어 쪽잠을 잔 뒤 오전 5시쯤 일어나 길을 떠났을 게다.

하지만 지난봄 읍성 성벽이 완전히 헐린 터라 육중한 영남제일관이 주는 위압감과 지키는 관병들의 눈초리를 걱정할 일이 없어졌다. 종루마저 흔적 없이 부서져 통행금지도 유야무야됐다. 이젠 밤이 좀 늦어도 길을 재촉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공연히 대구에서 자고갈 일도 없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 평양과 함께 3대 도시로 부상한 대구에는 1601년(선조34년) 경상감영이 옮겨왔지만 1736년(영조12년)에야 도심을 둘러싸는 석성(石城)이 쌓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 가운데 가장 먼저 대구로 쳐들어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軍)에 의해 대구토성이 무너진 후 1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읍성에는 네 개의 문이 세워졌다. 동쪽이 진동문(동성로 제일은행 앞), 서쪽이 달서문(서성로 옛 조흥은행 앞), 북쪽이 공북문(북성로 옛 조일탕 앞), 남쪽이 영남제일관(남성로 약전골목과 종로가 만나는 곳)이었다.

대구시사(大邱市史)에서는 ‘남문은 당시 영남제일관이라고 해서 대구의 출입문에 해당했다. 그곳에는 종루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종로는 그에서 연유하는 명칭으로 여겨진다’고 밝히고 있다. 영남제일관은 돌로 쌓은 대의 한가운데에 홍예문(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문)을 내고, 그 위에 정면과 측면이 각 세 칸인 2층의 문루를 세웠다. 종루는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읍성이 헐리기 전인 1904년 대구에 온 일본인 카와이 아사오는 그의 책 ‘대구이야기(大邱物語)에서 “성벽에 4대문이 있었는데 오후 8시경이 되면 각 문마다 튼튼한 문짝이 일제히 닫힌다”고 적고 있다. 성내 통행이 금지되는 것이었다.

영남제일관은 대구의 남문이었지만 정문 역할을 했다. 신임 관찰사들이 서울에서 부임해올 때 가까운 서문을 두고도 성을 빙 돌아서 영남제일관으로 도임행렬을 한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경상감영과 대구부 사이로 난 대구의 남북길이 종로였으니 종로의 지위 또한 대구에서 첫손가락이라 할 만했다.

◆종소리를 잃은 종로의 변모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종루는 어느 순간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하지만 도시의 중심으로서 갖는 장소적 기능은 여전했다. 종루 앞을 지나는 길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면서 종로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됐다.

서울에서는 1898년 최초의 궤도 전차가 종로를 중심으로 깔렸다. 서대문에서 청량리를 잇는 전찻길이 종로를 지나게 된 것이다. 전차가 다니면서 도성 문을 열고 닫는 일이 무의미해졌고 종루도 소리를 낼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전찻길의 중심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은 종로는 서울 발전의 핵이 된다. 1970년에 부설된 지하철 1호선이 종로를 기준점으로 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대구에서는 종루가 읍성 철거 때 함께 사라지면서 도시의 시간을 알리는 공적 기능 자체가 없어졌다. 영남제일관을 드나들던 경상감사의 행렬도 끊겼다. 이 자리를 대신한 것이 상업적인 기능들이다.

이 시기 종로 주위로 가장 먼저 스며든 사람들은 중국 상인들, 즉 화교들이다.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는 구한말부터 이미 일본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화교들도 걸음을 돌렸다. 약령시와 인접한 점도 화교들에게는 유리하게 판단됐을 것이다. 화교들은 1970년대까지 종로를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지만 이후 우리나라의 어긋난 외국인 정책 때문에 상당수가 떠나고 지금은 일부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화교와 함께 종로 일대에 들어온 것은 요정들이었다. 기생들을 훈련시키는 권번도 여럿 생기면서 종로는 밤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종로의 기생들은 일제와의 마찰 속에서도 기예와 품위를 잃지 않고 일제가 현재 도원동에 설치한 유곽들에 맞섰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기를 거치며 급속히 쇠퇴한 뒤 부침을 거듭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화교들이 떠난 자리를 채운 것은 가구상들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가구사 상호가 내걸리기 시작해 1970년대 초에는 만경관 입구 네거리에서 염매시장 입구까지 300여m 거리에 가구점, 공예사 등이 50개를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가구상들은 대부분 떠나고 금고상 일부만 남은 자리에 전통차와 다기세트, 앤티크, 골동품 등을 다루는 상인들이 들어와 있으며 염매시장에서 밀려난 떡집들도 종로의 구성원이 됐다.

경북도청이 북구 산격동으로 옮겨가고 도심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가면서 종로의 상권들도 중심성을 잃고 쇠락하고 있다. 하지만 종로에 남은 역사성과 전통을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각시키려는 시도가 최근 시작돼 관심을 끈다. 종로가 또 어떤 면모를 갖추게 될지 기대된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조선시대 종루 외곽에 세운 이유 뭘까

조선시대 도시는 종소리를 같이 듣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자연에 순응해 시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농촌지역과 달리 도시의 시간은 나름대로 통제됐다. 그런 만큼 종은 도시의 중심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서울이든 대구든 종루는 공간적으로 중심에 있지 않았다. 서울의 경우 정도(定都) 직후에는 원각사 입구에 종을 걸었다고 하니 중심에 가까웠다. 하지만 태종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웅장하지만 시끄러운 종소리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가까이서 듣고 싶지 않은 왕의 심리가 작용한 듯하다. 물리적 중심과 감성적 중심의 충돌인 셈이다.’(전우용 ‘서울은 깊다’)

이런 불합리함을 덮으려는 듯 종루를 중심으로 한 거리는 도시의 중심이 됐다. 육의전의 중심 상점이 종각 주위에 분포된 것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해서 동서로 뻗은 길을 조선 초기부터 운종가(雲從街)라고 부른 것도 상업적 중심이 되면서 사람이 구름처럼 몰리는 현상을 나타낸 것이다.

대구 종루가 읍성의 중심지가 아니라 남문인 영남제일관에 설치된 이유에 대해서는 문헌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서울의 해석에 견준다면 ‘경상감사의 새벽과 밤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는’ 뜻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사람이 많이 다녀 정문 역할을 하는 영남제일관에 종루를 만든 건 서울의 종로처럼 상업적 기능을 배려한 게 아닐까. 전문가들의 연구를 기다려본다. 김재경기자

기사 작성일 : 2009년 08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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