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8>종로 스토리-③ 종로에 머문 군대 -090820-

思美 2010. 4. 1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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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8>종로 스토리-③ 종로에 머문 군대
 
조선 마지막 군대의 모습. 순종은 1907년 조칙을 내려 군대 해산을 선포했으니 국운이 다하는 징표가 됐다.
 
일본인들의 청원으로 1916년부터 대구에 주둔한 제80연대. 해방 후 미군에 접수돼 지금의 캠프헨리가 됐다.
종로는 경상감영 400년 역사 동안 중심이 되는 길이었다. 정문 격인 영남제일관에서 감영 객사로 이어지는 길에는 위엄이 있었다. 관아의 입구를 상징하는 홍살문 부근에 수백명의 군인들이 주둔하며 감영을 지켰다. 조선의 몰락이 군대 해산과 궤를 같이한다면 종로가 세력을 잃은 것도 경상감영을 지키는 군대의 해산과 맞물려 있다. 해산 당시 대구를 지키던 군대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았다.

◆감영을 지키던 군대

경상감영의 수비대는 현재 한일시네마 자리인 동성로 일대에 주둔했다. 병사는 400명 정도로 관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그 뒤 행정개혁이 이루어지며 지방 군대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진위대다. 대구에는 진위 3연대 본부와 1대대가 주둔했다. 1888년(고종25년) 선화당 남쪽 100보 지점에 감영의 장수 이호준이 친군남영(親軍南營)을 만들고 병력을 재편했다. 이곳에 600명의 병력을 두고 훈련시켰는데 연병장은 남문 밖 관덕당 앞(염매시장 뒤쪽)에 있었다.

이 군대는 1907년 7월 순종의 군대해산 조칙과 함께 서울부터 해산당한다. 순종은 대부분 서민으로 생계 수단을 잃게 되는 군인들을 달래기 위해 1인당 25~80원의 은사금(恩賜金)을 내렸다. 8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군대해산식이 열렸으나 병영마다 소동이 일어났고 전국적인 무장봉기와 항쟁으로 이어졌다. 대구진위대 역시 같은 시기 해산의 운명을 맞았고, 조선 군대가 떠난 자리를 일본 군대가 대신했다.

◆의병에겐 총을 쏠 수 없다

대구진위대는 해산 이전부터 일본군으로부터 사사건건 간섭을 받는 처지였다. 국운이 기울고 있는 나라의 군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하지만 군인들은 나름대로 일본군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버텼다.

군대 해산 1년 전인 1906년의 기록을 보면 10월에 집행된 화적 3명에 대한 총살형 이야기가 나온다. 화적이란 일본인 병사를 죽인 의병을 일컫는다. 일본 언론인 가와이 아사오가 쓴 ‘대구이야기’를 보자.

‘언덕 경사면에 간격 10보를 두고 3인의 범인을 기어가도록 했다. 약 15칸쯤 떨어진 곳에 한국인 병사 30여명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한국인 병사 뒤에는 10명가량의 일본병이 무장한 채 감시하고 있었다. 사격하라는 호령이 떨어지자 한국병 30인의 총구에서 일제히 총성이 울렸다. 그 순간 오른쪽 범인의 엉덩이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을 뿐 다른 2명에게는 조준이 맞지 않아 별 일이 없었다. 잠시 어이없어 말도 못했다. 다시 총알을 장전하게 하여 30명이 일제 사격을 했으나 명중되지 않자 제일 왼쪽에 있던 죄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언덕 위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죄인은 결국 붙잡혔고 일본군은 1인당 3명의 병사가 총구를 등에 대고 쏘도록 해 사형을 집행한다. 가와이 아사오는 '한국병의 서투른 사격술에 놀랐다'고 적고 있으나 총솜씨가 좋아 러시아까지 파견됐던 조선 군대이고 보면 총이 빗나간 원인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의병이 된 군인들

군대 해산은 단순히 조선 군인들의 생계를 끊는 차원이 아니라 나라가 기우는 징후다. 해산된 군인들은 의분을 품고 곳곳에서 일본군과 충돌했다. 일본인들의 집은 물론 관청을 습격하는 사건도 잦았다. 한국에 사는 일본인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대구에서는 유혈사태가 생기지 않았지만 많은 일본인들은 부산으로 피란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구역에 10여량의 객차를 세워 뒀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기적 소리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에게 파는 음식에는 독을 넣는다는 둥, 누구의 집부터 습격할 것이라는 둥 유언비어도 대단했다.

‘후쿠나가씨는 당시 남문 내에 살고 있었는데 폭동이 일어나면 불똥을 맞을 것 같아 7월 하순부터 가재도구를 정리해 밤에 몰래 뒤뜰을 파고 소장하고 있던 신라 자기, 고려 자기 등을 묻어두었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일본인들은 자기네 군대를 불러들여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으려고 애를 썼다. 수비대 격인 제12여단사령부, 보병 제14연대, 47연대가 대구에 2년 동안 주둔하며 일본인들을 보호했다. 1909년 이 부대는 본국으로 귀환하고 대구에 조선파견대사령부가 설치돼 제2연대본부와 제3연대 2대대 병력이 주둔했다. 이들은 진위대가 있던 종로와 훈련장인 관덕당을 차지했다.

해가 갈수록 대구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늘어났지만 일본인들은 언제 닥칠지 모를 독립군의 위협을 두려워해 1915년 총독 데라우치에게 병영 설치 청원서를 보냈다.

‘대구는 남선의 중간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이고 지금 사령부와 연대본부가 설치돼 있으나 대구의 물자 조달이 자유롭고 날씨도 좋은 데다 수도도 완성되어 5만명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오고 하니, 대구에 병영을 설치함이 좋을 것입니다.’

이듬해 5월 대봉동에 20사단 제80연대가 주둔하게 됐다. 이 자리가 해방 후 미군에 접수되면서 지금의 캠프헨리가 됐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0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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