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5>계산동 스토리-(1) -2009/10/08-

思美 2010. 4. 1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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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5>계산동 스토리-(1)길이 동네를 만들고 사람을 낳다
▲1935년 계산성당 주변 풍경. 마렐라 교황대사가 대구교구를 방문하자 성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사 화보
 
▲매일신문사 뒤편에서 동쪽으로 난 대구읍성 앞밖길의 현재 모습. 김태형기자 thkim@msnet.co.kr
계산동은 조선 말 대구를 가로지르는 하천을 끼고 읍성의 남쪽 성곽 옆에 생긴 동네다. 계산(桂山)은 계수나무가 있는 산이란 뜻인데 인근에 산이라고는 동산뿐이었으니 동산 아래 동네라는 의미일 터. 일제강점기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리다 1947년 계산동으로 바뀌었는데 계수나무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사람의 길이 만든 동네

흔히 길을 말하는 도로는 한자의 구성을 보면 흥미롭다. 도(道)는 우두머리(首)가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다닌 길로, 왕조시대를 놓고 보면 왕이나 왕의 권한을 대리하는 지역 책임자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낸 길로 볼 수 있다. 노(路)는 이와 달리 사람들이 제각기(各) 발로 밟고(足) 다니다 보니 저절로 생긴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계산동은 대구 읍성 남쪽 성곽 밖으로 난 길(路)을 따라 생기고 흥성한 동네다. 매일신문사 뒤편에서 동쪽으로 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까지 이어지는 길은 앞밖걸이라고 불렀다. 대구 읍성을 기준으로 성의 앞(前)밖(外)걸(街)이라는 뜻이니 읍성 앞 바깥길이라는 뜻이다. 앞밖걸은 읍성 안과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평민과 농촌 사람들이 몰려 물건을 거래하고 성안에 볼일이 있는 이들이 묵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상점이 발달해 망건이나 탕건, 갓을 파는 곳이 많았고 성안에서는 볼 수 없는 시래기나 생나물 같은 농가 부산물들을 사고파는 거래가 활발했다. 숙박시설이나 음식점이 많았고, 음식점 뒷방에는 나그네나 상인들이 끼어 자는 모습도 흔했다.

‘이곳은 양반들이 아닌 상인들이나 평민들이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랑과 인정이 넘치고 서로 감싸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계산성당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이 같은 지역 분위기가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천주교 옛 공소들의 어제와 오늘)

앞밖걸은 또 다른 측면에서 역사성을 갖고 있는 길이다. 대구 이남의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 길을 거쳐야 했으니 영남대로의 한 구간이다. 경상도에서 서울로 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였다. 장사꾼이 한 부류요,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가는 선비들이 한 부류였다. 이 길을 과거길로 부르는 이유다.

◆큰길이 나고 골목이 되다

1906년 대구읍성이 파괴되고 무너진 자리에 큰길이 났다. 남성로다. 1908년 경상감영 객사가 헐리면서 남성로 일대에 큰 변화가 생겼다. 17세기 효종 때부터 감영 객사 주변에서 봄 가을 정기적으로 열렸던 약령시가 장터를 잃어버리자 상인들이 남성로 일대로 밀려온 것이다.

‘객사가 헐리고 나니 따라서 약령시의 장소도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종로부터 연장하여 남문의 성벽거리로 이전한 것이 1908년 가을이었다. 남성로 약령시는 그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약령시는 남성로로 옮겨오면서 상설화됐고, 약재상들이 일대를 차지하게 됐다. 큰길 주위로 집들이 촘촘히 들어서면서 앞밖걸은 한층 좁아져 골목 형태로 바뀐다.

둘이 지나기에도 비좁은 골목이 됐지만 이 길은 여전히 사람들의 주요 통행로였다. 왕조가 무너져도 사람들에게 큰길은 언제나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곳이었다. 앞밖걸이 평민들의 길이 된 것도 서울 종로 옆으로 피맛길이 생긴 유래와 다를 바 없다. 피맛길은 ‘물렀거라’라고 떠들어대는 관리들과 그들이 타는 말을 피해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란 뜻이다.

날이 갈수록 약령시에 한의원과 약종상, 중간상인 등 한의약업인들이 늘어났다. 전국에서 약을 사고팔려는 사람들이 몰렸고, 이들은 거래를 위해 며칠씩 먹고 잘 곳이 필요했다. 앞밖걸에는 상인들을 위한 객주나 여각 등이 더 밀집하게 되고 한약상들을 위해 환전이나 대부 등 금융기능을 하는 곳,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던 곳 등도 새롭게 생겨났다. 영남대로의 기능은 점차 쇠락했지만 약령시의 배후로서의 기능을 만든 것이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다

앞밖걸 서쪽으로 영역을 넓혀간 계산동은 교통과 시장의 요충지를 끼고 있는 만큼 사람들의 삶은 팍팍하지 않았다. 부유한 상인들이나 형편이 나은 평민들이 모여 살다 보니 생활환경도 다른 지역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

‘남한의 웅도인 대구의 대로는 지금의 명치정(계산동) 거리였는데 여기만은 그래도 주택 내의 변소를 노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근방의 골목으로 들어서면 어느 집이라 할 것 없이 담이 낮아 변소를 오가는 길에서 다 내려다볼 수 있었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그래서인지 계산동 일대에서는 근대 민족운동가와 예술가, 정치인 등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곳에서 예술작업을 하거나 살았던 이들도 많다.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서상돈, 민족시인 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문인화의 대가 죽농 서동균, 작곡가 김진균, 소설가 현진건, 시인 신동집, 음악가 박태준, 영화인 김유영 등 손에 꼽기 힘들 정도다. 월북화가 이쾌대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평생을 중구에서 살아온 권원순(미술평론가)씨의 기억. “어린 시절에는 약령시 서쪽 입구에 살았는데 계산동 곳곳에 유명한 예술가들이 있었어요. 앞집 뒷집, 한집 건너 한집꼴로 예술가들이 살았죠.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뽕나무가 우거진 풍경도 예술가들이 깃들기에 좋은 분위기였죠. 제가 미술 쪽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런 동네 분위기 덕분이었습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10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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