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6> 계산동 스토리-(2)근대 인물은 여기 있었다

思美 2010. 4. 1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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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6> 계산동 스토리-(2) 근대 인물은 여기 있었다
계산동은 종로와 약전골목, 서문시장의 가운데에 자리한 데다 영남대로가 지나는 중요한 길이었다. 부유층들이 밀집한 동네는 인물들을 속속 배출했고, 이들과 어울리거나 배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문화의 터전으로 떠올랐다.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예술가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하면서 계산동은 근대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의 중심이 됐다. 계산오거리에서 발길을 시작해 보자. 근대의 물결과 함께 떠올라 별처럼 빛났던 인물들의 면면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그들의 삶을 떠올리며 걷는 길은 더없이 풍성할 것이다.

우선 계산성당으로 향하는 계산오거리 모퉁이는 이효상의 고택이 있던 자리다. 시인이자 교육자, 정치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학자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가톨릭에 입교했으며 해성학교에 입학해 서동균, 서동진 등과 함께 다녔다. 서화의 대가 서동균이 “그림은 나를 따를 이가 없었으나 재주는 한솔을 따를 이가 없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이상화, 서동진 등과 함께 교남학교(대륜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그는 1939년 일제가 재단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폐교 처분을 내리자 수성동에 새 부지를 마련해 서상돈의 아들인 서병조를 이사장으로 대륜중학교를 인가받아 교장에 취임했다. 1951년에는 경북대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으로 취임, 4`19 때 경북대 교수단과 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섰던 그는 이후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장까지 지냈다.

큰길을 따라가다 계산성당 못 미쳐 새로 뚫린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상화 고택이 나온다. 중구청의 근대골목디자인개선사업 구간으로 동산에서 내려오는 3`1만세운동길에서 이상화 고택을 바로 잇기 위해 계산성당의 협조를 받아 막혔던 골목을 뚫었다. 시민들의 뜻과 힘을 모아 새로 단장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상화 고택 바로 못 미쳐 작곡가 김진균의 생가 터가 있고, 그 옆으로 영남대의 전신인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 최해청 선생 고택이 있었다. 최해청은 대구고보 시절부터 항일운동에 나섰으며 조선아나키스트동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해방 후 대중학술강좌를 열어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열기를 확인한 그는 대구문화과전문학원을 개설, 청구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문화수도 대구’간직한 추억의 골목

상화 고택 앞에 새로 지은 서상돈 고택도 들러볼 만하다. 당시 유지였던 서상돈이 40대 들어 옮겨온 옛 집에는 많은 이들이 묵어갔다고 한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그였지만 당시 일본인들도 그를 존경하는 분위기였다.

‘서상돈 옹은 독실하고 덕이 높은 사람으로 생전에 많은 음덕을 베풀었다. 그 당시 풍습으로 출입시에 5, 6명의 하인배를 거느리고 흰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의젓하게 길을 걷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서상돈 옹을 서시찰(視察)이라 높여 부르며 마주하는 사람마다 최고의 예의를 갖추었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포장된 길을 따라가면 왼쪽으로 처음 만나는 집이 이상정 고택이다. 이상화의 맏형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항일투쟁을 하다 만주로 망명했다. 이상화는 이상정을 만나기 위해 만주를 다녀온 것이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식당으로 쓰이는 이 집은 ㄱ자형 한옥으로 넓은 마당을 갖춰 근대 한옥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는 가치 있는 고택이란 평가다. 이상정의 부인 권기옥은 중국에서 교육받아 중국 공군에 입대한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 유명하다.

그 옆집은 대구상업회의소 초대 회장을 지냈던 서예가 회산 박기돈의 집이었다. 미술평론가 권원순씨는 “근대 초 대구 사람들의 생활 기반이 되는 상업 분야를 일으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동촌에 얼음창고를 만들어 얼음을 보관했는가 하면 서울서 이발사를 불러내려 이발소를 열었고, 목재상과 신약상도 영업을 하게 했다. 후손의 증언으로는 “국채보상운동 당시 한 번 외출하면 곰방대 30~40개를 빼앗아와 불태웠을 정도로 열심”이었으나 뒤에 친일 행적을 했다는 불분명한 이유로 조명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이웃해 살며 다방면 근대사상 이끌어

대구 서화의 대가로 알려진 죽농 서동균은 향촌동에서 태어났지만 계산동에 화실을 열었다. 구한말 시`서`화를 비롯해 팔방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서병오에게 서화를 배운 서동균은 평생 대나무 그림만 그리겠다는 뜻으로 ‘죽농’(竹農)이란 호를 썼다. 사군자에서 경지에 오른 그의 죽음을 두고 ‘한국 문인화의 종언’이라는 평가까지 내려질 정도로 한국 미술에 큰 공헌을 했다.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는 서병오와 서동균의 사제 관계를 이야기로 만든 것인데 여기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이야기가 분분하다. 대구 문화의 큰 축을 형성한 인물들인 만큼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계산동에서 남성로로 이어지는 곳에 음악가 박태원, 박태준 형제의 생가 터가 있다. 서양음악을 한국에 도입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형 박태원은 1917년 제일교회에서 대구 최초의 혼성합창단을 구성, 발표회를 갖기도 했으나 스물넷의 나이로 요절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동무생각’의 작곡가 박태준은 계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빼어난 동요들을 작곡해 홍난파, 윤극영과 함께 당대 3대 동요 작가로 꼽혔다.

이들 외에도 소설가 현진건, 시인 백기만과 신동집, 서양화가 이쾌대 등이 계산동에서 활동하면서 일대를 문화 향기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대구에서 근대 문화지도를 가장 먼저 그려야 할 곳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예술가들의 생가나 작업실 등의 위치조차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스토리만 담아 내도 대구를 전국 최고의 문화도시 반열에 올릴 수 있을 텐데 행정기관과 문화계의 관심은 여전히 일부에만 그치고 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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