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17)계산동 스토리-③염매시장의 성쇠 -091029-

思美 2010. 4. 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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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17)계산동 스토리-③염매시장의 성쇠
염매시장의 오늘날 모습. 몇 개의 골목으로 분산돼 시장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위축됐다.
 
1920년대 서문시장의 모습. 초가지붕 아래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근래 전통시장들의 쇠퇴가 확연하지만 염매시장만큼 전성기와 현재가 눈에 띄게 차이 나는 곳은 드물다. 염매시장(덕산시장)은 당초 노점과 상설점포, 주막과 여관 등이 성밖골목에 밀집하면서 자연스레 형성됐다. 18세기 말 동문 밖(현재 한일극장에서 대구백화점 일대)으로 옮기며 서문시장과 맞서는 동문시장으로 바뀌었다가 1917년 다시 현재 위치로 돌아왔다. 시가지 확장으로 일부가 남문시장으로 떨어져나가며 확연히 위축된 시장은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이 장세를 확대시키기도 했으나 동아쇼핑 입점에 이어 현대백화점까지 자리를 잡으면서 몇 개의 골목만 남았다.

◆대구의 시장

서문시장의 이름이 왜 서문시장이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1906~1907년 사이 대구읍성이 무너지면서 동서남북의 문이 함께 철거돼 대구 도심에서 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지 벌써 10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서문시장은 조선 후기 이래 대구읍성의 서쪽 하천변인 동산동과 시장북로, 서문로와 대신동, 계산동 등지에 걸쳐 있던 대구의 대표적 시장이었다.

서문시장의 반대편인 동문 쪽에 시장이 들어선 것은 정조 15년(1791년)의 일이다. 동문시장(당초 이름은 대구신장)은 자연스레 형성된 시장이 아니라 남문 밖 시장들을 옮긴 것이다. 남문 밖 시장은 읍성의 남쪽 출입구인 영남제일관 밖 일대로 경부가도인 영남대로를 지나는 과객, 상인 등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를 동문 밖으로 이설했다. 규모는 서문시장의 절반 정도였다. 서문시장은 2일과 7일에 개장했고 동문시장은 4일과 9일에 개장했다.

도시에서 시장이라고 할 때 시(市)는 일정 지역에 정비해 설치한 상업구역을 일컫는다. 장(場)은 행상이 몰려 거래했다가 물러가는 곳이었으니 도시에서의 시장은 장보다 시의 성격이 강하다. 상설점포가 밀집한 가운데 특정 날짜에 행상들이 몰려드는 공간이었다. 농촌의 정기시가 장의 색깔이 짙은 장시(場市)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도시에 상설시장이 점차 자리를 잡은 것은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행상이나 좌고(좌판에 앉아 장사를 하는 사람)의 위생에 문제가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됐다.

대구는 17세기 이후 교통의 요충지가 된 만큼 시장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특히 봄가을 열리는 대목장에는 서울상인이 들끓었고 충청, 전라는 물론 강원, 평안, 함경도 등지와 중국에서까지 상인들이 왔다고 한다. ‘11월 대목장이 개시되면 수일 전부터 성내 가가호호 모두가 점포가 되고 빈터만 있으면 가설 움막을 만들어서 개점했다. 수백 마리의 마필과 수만 명의 상인이 한 달 정도 체류해 대구 상인의 수입이 막대했다. 한 달 장사로 1년의 생활비를 벌었다.’(대구이야기, 매일신문 1992년)

◆근대화의 여파

20세기 들면서 대구의 시장은 변모를 강요받는다. 일본 상점은 매일 문을 열어 새로운 물건들을 팔았고, 중국 상인까지 상주하면서 쇠퇴하게 된 것. 특히 경부선 철도의 개통은 시장 가격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식료품 가격을 말한다면 쇠고기 1근에 3~5전, 닭 1마리 5~6전, 계란 3리, 쌀 1되 4전5리 내지 5전. 이상은 모두가 이 고장의 산물이기에 놀랄 정도로 쌌다. 반대로 일본 술이나 맥주, 된장, 간장 등은 놀랄 정도로 비쌌다. 기차가 완전히 개통되고 난 뒤부터 가격은 조금씩 완화되었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동문시장은 1917년 염매시장이란 이름으로 남문 밖으로 돌아왔다. 일제가 경상감영 객사를 파괴해 약령시가 남성로로 옮겨오면서 동문시장을 남문 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논의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원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이전의 성세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약령시를 보조하는 주막과 여관, 잡화점과 채소시장 등이 덕산동까지 퍼져 있었으나 해가 갈수록 거래 규모는 줄었다. 게다가 대구 인구가 증가하고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1937년 남문시장이 설치되자 상인들 상당수가 이리로 옮겨 오히려 염매시장보다 규모가 더 커졌다.

염매시장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시장에 비해 가격이 싸서 염가(廉價)로 판다는 해석과 소금(鹽)을 많이 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확실한 기록은 없다.

◆떡전골목과 백화점

염매시장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피난민들이 몰려오면서 성장세에 접어든다. 1970년대까지 300개가 넘는 점포들이 성업했고, 대구에서 신선도가 가장 높고 품질 좋은 식료품들이 유통돼 시내 상인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떡전골목이 상설화돼 시민들의 인기를 끌었다. 피난민들이 염매시장 인근에서 떡 좌판을 펴거나 행상을 하면서 시작된 떡전골목은 1960년대 동아쇼핑 서쪽에 노점 형태로 상설화됐고, 상점 형태로 발전해 고급화의 길을 걸었다. 대구시민들에게 혼수떡, 폐백떡 등 중요한 행사에 쓰이는 특별한 떡은 염매시장에 가서 사는 게 일반적인 일이 됐다.

1984년 동아쇼핑이 들어서면서 큰 부지를 잃은 떡전은 성밖골목이나 동아쇼핑 인근으로 퍼져 점차 위축됐고, 삼성금융프라자가 세워져 다시 설 자리를 잃었다. 마지막 철퇴를 가한 것은 최근 공사가 한창인 현대백화점 입점. 성밖골목의 떡전은 대부분 백화점 부지에 편입됐고, 점포들은 하나둘 종로 쪽으로 밀려났다. 다행히 20~30년의 명성은 남아 손님들의 발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으며 상인들도 예전의 면모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염매시장은 원래의 터를 고스란히 백화점과 대형건물들에게 내주고 골목 몇 개에 근근이 깃들어 시장이라고 부르기에 초라할 정도가 됐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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