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18)서성로 스토리 ①우현서루와 교남학원 1105

思美 2010. 4. 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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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18)서성로 스토리 ①우현서루와 교남학원
 
서성로에 있는 이일우 고택의 모습.
 
서성로와 북성로가 만나는 지점에 설립됐던 우현서루의 복원 그림. 이일우의 손자 이합희가 고증하고 김일환이 그렸다.(대륜80년사)
서성로는 대구읍성이 무너진 터 가운데 약전골목 끝에서부터 북성로 입구 구간에 새로 난 신작로다. 중간 쯤 읍성의 서문인 달서문이 있던 자리는 경상감영 앞에서 뻗어나온 서문로와 만났다. 일제 강점기 서문로는 행정과 금융 기능이 활성화된 길로, 서성로 일대에 살던 조선인 부자들의 영역과 맞물려 대구의 중심 기능을 했다. 약령시와 염매시장 등 시장 형태의 상업이 발달했던 남성로와는 사뭇 다른 유형이었다.

◆야구시합, 나라 잃은 설움을 폭발시키다

1915년 늦은 봄. 지금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자리에 있던 동운정 운동장에서 야구시합이 열렸다. 숙명의 한·일전. 대구경북에서 벌어진 첫 야구 한·일 대결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무명 잠방이에 짚신을 신고 야구를 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유니폼과 장비를 갖추고 벌어진 경기였다.

한국팀은 대구청년단. 강의원(講義院)을 이끌던 윤홍렬을 비롯해 오재숙, 박태준, 김보술 등이 팀을 이뤘다. 이들은 상당한 실력을 보였던 동경유학생 야구팀과 봄에 더블헤더로 경기를 치러 1승1패를 기록했을 정도로 만만찮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상대팀은 일본인 야구구락부. 우리보다 야구를 먼저 받아들인 만큼 실력이 녹록잖다는 평판이 돌고 있었다.

대결이 대결인지라 대구는 물론 경산 등지에서도 구경꾼이 몰려 운동장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야구라는 종목에 대한 관심도 있었겠지만, 스포츠 말고는 공개적으로 일본과 싸울 자리가 거의 없어진 현실도 한몫 했다.

경기는 초반부터 팽팽해 멋진 승부가 기대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주최와 심판 모두 일본인이 맡았다는 사실. 경기가 진행될수록 판정은 편파적으로 흘렀다. 윤홍렬이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고 있던 순간, 일본인 선수 하나가 야구방망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일방적인 판정에 이미 술렁이고 있던 관중들은 즉시 운동장으로 밀려들었다. 나라 잃은 설움이 터지고 만 것이다.

‘삽시간에 운동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분노한 관중들이 달아나는 일본인 심판과 선수들을 뒤쫓아 마구 두들겼다. 거리로 몰려나온 관중들은 일본인 상점을 덮치기도 해 일본인들은 문을 잠그고 피신했다. 일본인 심판, 선수들이 경찰서장을 앞세우고 강의원에 나타나 정식으로 사과한 후 험악한 사태는 수습됐다.’(경북체육사)

폭발의 불씨가 사그라지자 일본인들은 보복에 나섰다. 대구청년단 야구팀의 주축이었던 강의원을 해산시키고 한국인들의 운동 경기 자체를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의기를 세운 우현서루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신문물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커지고, 일제 침탈로 민족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교육기관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이 가운데 강습소, 야학, 학원, 학숙, 의숙 등 비정규 교육기관들은 민족교육의 주역을 자처했다. 민중을 계몽시켜 실력을 양성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의식은 전국적으로 번졌다.

서성로에 세워진 우현서루(友弦書樓)도 같은 취지였다. 1905년 을사늑약 후 국운을 걱정한 이동진(시인 이상화의 조부)이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 우현이란 춘추시대 지사 현고를 벗삼는다는 뜻이다. 정나라 상인 현고는 우연히 자신의 나라를 기습하러 가던 진나라 군사들을 발견하고는 꾀를 냈다. “정나라 왕이 진나라 군사들을 위무하라고 명해서 왔다”며 자신의 소를 잡아 바친 것. 기습 사실을 들켰다고 판단한 진나라 군사는 그 길로 철수했다. 중국 고사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지혜를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서루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를 기르는 곳이니, 우현서루가 문을 열자 그 뜻에 공감한 인사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장지연, 박은식, 이동휘 등 150여명의 지사들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이상화의 백부 이일우는 이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 중국 등지에서 1만권 이상의 서적을 수입, 비치했다.

이일우는 1910년 국권을 뺏은 일본에게 중추원 참의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하는 등 비협조로 일관했다. 이듬해 우현서루는 강제 폐쇄됐다. 민족정기 양성의 상징이던 이일우와 우현서루를 손에 넣지 못한 일제의 보복이었다.

◆대륜의 전신 교남학원

서루는 사라졌지만 그 정신과 건물이 폐쇄될 리는 없는 일. 이일우는 강의원과 애국부인회를 만들어 이곳을 무료 교육기관으로 사용하게 했다. 강의원은 한·일 야구시합의 후유증으로 다시 폐쇄됐다.

이때 강의원의 운영을 맡은 이가 홍주일이다. 청도 출신의 홍주일은 동경문리전문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졸업해 대구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몸담아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으로 다시 피감된 그는 출옥 후 1921년 김영서, 정운기 등과 의기투합해 교남학원을 개교했다.

우현서루를 가교사로 시작한 교남학원은 신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을 위해 초등과와 중등과, 고등과 등 3개 과로 편성됐다. 1922년 초등과 졸업생만 203명이었으니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민족교육기관으로 설립됐으니 설립 불인가 등 일제의 탄압이 적잖았다. 그러나 우현서루의 정신은 면면히 교남학원으로 이어졌다.

‘체조 교원 김하정은 구한국군 군관 출신이었다. 그는 체조를 통해 대일 항쟁의 무력적 기초를 닦는다는 정신으로 체조교육에 전념했다. 그는 체조시간에 구한국군의 군가를 몰래 학생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다. 군가 교습은 장거리 구보라는 목적으로 시가지를 벗어나 한적한 장소에서 실시됐다. 군가 합창은 학생들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의식에 대한 각성과 자극이 됐다.’(대륜 80년사)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1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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