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9>서성로 스토리-(2)서문로 무영당 | |||||||
◆근대의 상징 백화점 난전과 좌판, 보부상이 장터를 전전하며 상업의 주역을 자처하던 시대는 상설점포가 하나둘 생기면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상설점포 가운데서도 백화점의 등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1920년대부터 서울과 대구, 부산 등 주요 도시의 중심지에 들어선 백화점은 3~5층의 거대한 규모에서부터 화려한 쇼윈도와 깔끔한 진열대, 인사와 미소로 맞아주는 젊은 여성 점원 등 물건을 보기도 전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들은 대부분 근대 산업이 생산해낸 것들이었다. 넥타이와 원피스, 양산과 핸드백, 전축과 안경 등 신문물을 접해본 사람들이나 사서 쓸 수 있는 새로운 상품들이었다. 게다가 샹들리에가 달린 서양식 식당, 나무를 심고 벤치와 카페를 둔 옥상 정원의 풍경은 ‘인공 낙원’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근대적인 풍경이었다. 백화점 가서 물건 하나 사고, 식당에서 밥 먹은 뒤, 옥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일이었던 때였다. 도시에 구경 온 사람들이 물건은 안 사도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백화점이었다. 사람들의 구매를 부추기는 형태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수기가 되면 신문마다 백화점 전면광고가 실렸고, 각종 기념행사를 이유로 사은품을 제공했다. 1931년 서울 화신백화점 창립 기념 대매출 신문 광고에는 ‘일원어치 물건 사면 소 한마리’라는 경품 행사 안내가 실리기도 했다. 백화점 한곳에 전시장을 만들어 그림이나 사진 등의 전시회를 자주 연 것도 지금과 같은 손님 끌기 전략이었다.
◆일본 백화점과 겨룬 무영당 대부분의 백화점들은 몇 가지 상품을 취급하는 점포나 잡화점이 규모를 키우고 품목을 다양화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인이 세운 첫 백화점인 화신백화점도 1890년대 귀금속을 거래하던 화신상회가 양복부, 잡화부를 만들면서 백화점 형태를 갖추었다. 1937년 서문로에 5층 흰색 타일 건물로 세워진 무영당(茂英堂) 역시 마찬가지. 창립자인 이근무는 서성로변에서 33㎡(10평)도 안 되는 문구점으로 시작해 일본인이 세운 이비시야, 미나카이 못지않은 백화점으로 키웠다. 무영당은 문구점에서 출발한 만큼 1층에서 문방구와 미술용품, 양말, 속옷 등을 팔았고 2층에서는 학생들의 운동복을 비롯한 의류를 팔았다. 3층에는 도자기와 식기 등 주방용품이 많았고 4층에는 전축과 악기 등을 파는 매장과 식당이 있었다. 1층 쇼윈도에는 여름이면 해수욕 용품을 전시하고 겨울에는 스케이팅 용품을 선보여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2층 한쪽에 전시장을 만들어 전시회나 발표회 등을 자주 열었다. 자본력이 큰 일본 백화점에 맞서 무영당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사람이 만든 백화점이란 동질감이 크게 작용했다. 전시장이 조선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의 약속장소가 되고 청년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는 점도 무영당의 매력이었다. 이근무는 1920년대부터 청년들 사이에 ‘원하는 책을 어김없이 구해주는 수완가’로 통했다. 일제가 금서(禁書)로 지정한 좌익 서적이나 러시아 소설 등도 무영당에서는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진 1930년대 중반 이후 금서들을 구하기 힘들어졌어도 지식인들과 청년들이 여전히 무영당을 찾은 건 자연스럽게 만나 생각을 나누고 일을 도모하기가 그만큼 쉬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성상인의 후예 이근무 무영당 점주 이근무는 고추씨 세말을 들고 대구에 내려와 거상이 된 개성 사람이다. 개성상인의 후예답게 그는 친절함과 신용을 장사의 밑천으로 삼았다. 학생들이 많이 찾는 문구점을 할 때부터 언제나 공손하고 친절한 자세를 유지해 단골이 많았다. 남녀 점원들은 모든 손님들에게 높임말을 쓰게 하고 단정한 복장을 강조했다. 구두를 오래 신기 위해 밑창에 징을 박는 일도 손님들이 시끄럽게 느낄 수 있다며 금지했다. 무영당은 당초 이근무가 자신의 이름 가운데 ‘무성할 무(茂)’를 따 꽃부리(英)가 무성한 나무처럼 번창하라는 기원을 담아 지은 상호였다. 연합국과 전쟁을 시작한 일제가 ‘영국의 번영을 바라는 이름’이라고 해석하는 바람에 ‘영화 영(榮)’자로 바꾸는 해프닝도 있었다. 1920년대와 30년대 일제의 눈을 피해 대구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신지식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근무는 일제 말기 창씨개명을 하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대구상공회의소 회원이 돼 몇년을 근무하는 등 행보가 뒤집혔다. 이 때문에 무영당도 해방과 함께 문을 닫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09년 11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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