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20>서성로 스토리 ③정치.행정의 중심지 | |||||||||||||||||
◆우체국과 측후소 우리나라에 근대 우편제도가 마련된 것은 1884년의 일이다. 고종의 명으로 홍영식이 우정총국을 설치하고 그해 10월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개국기념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20일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우편요금은 거리에 관계없이 요금을 부과하는 균일제였으며 무게에 따라 달리 했다. 우정총국이 문을 열면서 5종의 우표가 준비됐으나 2종만 발매되고 나머지 3종은 팔리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10년이 지난 1893년 전신만 취급하던 전보총국에 우편업무를 더해 전우총국이 출범했다. 이듬해 서울-인천 간 우편 업무가 재개됐고 1895년에는 대구에도 우체사가 설치돼 대구 우편사업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실제 우편사무 취급은 1904년 서문로에 우편수취소(受取所)를 설치하면서 시작돼 몇 번의 변화를 거친 끝에 1905년 대구우편국이 설치됐다. 현재의 위치로 청사를 지어 옮긴 것은 1912년이니 대구에 본격적으로 우편과 전신, 전화를 통한 의사소통이 시작된 것도 그때쯤으로 볼 수 있다. 대구에 전화가 처음 개통된 것은 1906년의 일이다. 당시 관공서를 합해 100대도 안 되었으니 일반인들에게는 신기한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전화 매매가 전혀 없었다. 가설 신청료가 50원 정도나 들었는데 가설료를 포기해도 인수할 사람이 없다가 1909년부터 전화 수요가 늘기 시작하자 70원 내외로 매매되기 시작하였다. 호황시대의 최고값이 대구에서 1천7백~1천8백원 했으니 꿈과 같은 옛 이야기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날씨를 알리는 측후소는 1907년 관측소 지소로 출발해 1910년에 대구측후소가 됐다. 종로초등학교 건너편에 들어선 최초의 측후소는 대한제국이 설립한 것이었다. 다른 기관과 달리 측후소는 서울이 아니라 인천에 먼저 문을 연 뒤 경성과 평양, 대구 등 네 곳이 뒤를 이었다. 대구측후소가 문을 연 지 한 달 만에 일본 통감부의 손에 넘어가 관측 업무도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소방서와 망루 현재 중부경찰서 옆으로 대구 최초의 소방서가 있었다. 한국인보다 화재에 훨씬 민감했던 일본인들은 1907년 대구부에 소방기구 설치를 요청했고, 그렇게 생긴 것이 관설소방조다. 대구부 관아 건물 앞에 소방차를 대기시켜 화재에 대비했으나 장비는 보잘 것 없었다. 1910년쯤 종로초등학교 양쪽으로 대구경찰서와 대구소방서가 들어섰다. 대구소방서는 중앙로가 생기자 1919년 남일동 쪽으로 옮겨 수관차 2대 등 어엿한 소방시설의 면모를 갖췄다. 서문로의 소방서는 소방분대로 격하됐다. 최초의 소방서로서 위상은 떨어졌으나 불을 제압하는 상징은 서문로에 남았으니 바로 대구소방서 망루였다. 일본의 오래된 마을들에 가 보면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에 망루 형태의 시설이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목조건물이 대부분이었던 일본은 한번 화재가 나면 마을 전체를 태울 정도로 빠르게 번졌으니 조금이라도 일찍 화재를 발견하는 게 마을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망루는 마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로 세웠다. 망루의 높이가 마을의 크기를 대신하는 셈이었다. 서문로에 들어선 망루는 처음 높이가 21.5m였다고 한다. 1910년쯤에는 대구 시내 전체를 그 정도 높이에서 한눈에 볼 수 있었음을 상징한다. 망루는 이후 1928년 30m까지 높였으니 대구 도심의 성장세를 가늠할 수 있다. 망루에는 언제나 소방대원이 올라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방공호가 있었다고 하니 전쟁을 앞둔 일본이 가장 먼저 공격받을 것을 감안해 만들어둔 것으로 추측된다. 해방 후에도 망루는 기능을 했으나 산업화시대가 닥치면서 점차 기능을 잃었고 1970년대 들어 헐렸다. 대구 소방행정의 발전도 그와 궤를 같이 하는 듯하다.
1940년 동산병원 큰불 났지만, 50명 환자부터 무사히 대피
인명 살리고 죽인 병원화재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신이시여,/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소방관의 기도) 대구는 전형적인 분지로 늦가을부터 겨울 동안 몽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팔공산이 어느 정도 막아 준다. 팔공산을 넘어온 몽고풍은 서문시장 일대로 불어왔다가 동산과 계성고 언덕으로 갈길이 막혀 회오리바람을 자주 일으킨다. 서문시장에서 불이 나면 빠르게 번지는 이유를 이 회오리바람에서 찾기도 한다. 서문시장 옆에 있던 동산병원에 1940년 큰 화재가 났다. 지붕 다락방을 보수하던 기술자가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에서 시작된 불은 다락방을 태우고 3층 지붕과 2층 벽으로 옮아붙기 시작했다. 엄청난 열기로 벽돌들이 튕겨 부근의 초가지붕을 태웠다고 하니 화재 상황의 다급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의료진은 당황하지 않고 환자들을 옮기는 일부터 서둘렀다. 불을 보고 달려온 계성학교 학생들에게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 다리 하나씩을 들도록 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방법으로 50명이나 되는 환자를 아무런 탈 없이 대피시켰다고 한다. 의료진은 당시 병원에서 가장 귀한 의료기기였던 X선 촬영기를 분해해 옮기는 일에 매달렸는데, 기자재를 옮기기 위해 달려오는 학생들을 보고 “이런 기자재는 미국에 편지만 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무엇보다 중환자부터 옮겨야 한다”고 재촉했다. ‘대구소방대의 소방차는 당초 소방대 망루에서 동산이 뒤쪽으로 가려 있어 미처 발견 못하다가 북부 본관이 무너질 때 요란스런 사이렌 소리를 내고 왔다. 그러나 빈약한 소방펌프 물이 불꽃 위까지 가지 못해 건물 와해 후 남은 불꽃을 뒤처리하는 데 불과했다.’(김용진의 대구이야기, 매일신문 1992년 7월 24일자) 반면 총독부 직속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발생했다. 1926년 3월 진료실에서 휘발유를 잘못 취급해 일어난 불로 환자 20명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 불이 나자 2층 목조건물은 금세 화염에 휩싸였다. 그런데 병원 직원들은 의료기기와 약품 등을 먼저 밖으로 옮기느라 입원실에 있는 중환자들을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였다. 시민들의 분노가 거셌지만 나라를 뺏긴 민족으로서는 그저 땅만 칠 뿐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09년 11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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