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1>북성로 ①철도가 바꾼 세상 | |||||
◆식민지 수탈의 도구 철도는 흔히 근대화의 산물로 여겨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철저히 식민지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놓였다. 일본은 조선을 수탈하고 만주와 일본을 연결시키는 고리로 철도를 부설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항구와 국경을 연결하는 노선을 하나씩 건설했다. 경인선, 경부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중앙선 등의 철도는 모두 남북을 가로지르는 형태를 띠었고 종착역은 어김없이 항구와 국경도시였다. 일본은 철도 부설권과 운영권을 확보한 뒤 건설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동원했다. 철도가 지나는 곳의 토지는 마구잡이로 편입됐으나 보상액은 시가보다 훨씬 적었고, 중노동을 강요당한 노동자들에겐 생계조차 힘들 정도로 쥐꼬리만한 수당을 쥐여주며 건설비를 최소화했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철도가 지나는 곳은 열 집에 아홉 집은 텅 비었고, 천리 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철도 부설 자체부터 수탈이었다. 철도의 등장은 예부터 우리나라에 발전해온 수로와 해상 교통망을 무너뜨렸다. 하천과 해안선을 이용한 수운은 산이 많은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스레 발달해왔지만 19세기 후반부터 놓이기 시작한 철도에 직격탄을 맞아 관련 상권까지 쇠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구 상권의 가장 큰 통로였던 낙동강의 사문진은 1910년대까지 쌀 1만섬을 위시해 각종 화물의 중개지로 번성했으나 1920년대에는 대구와의 연결이 약해지면서 기능이 거의 소멸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남대로를 벗어난 경부철도 조선시대 서울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길 가운데 영남지방을 지나는 대표적인 길이 영남대로였다. 대구 구간은 금호강을 건너 원대·팔달 나루터에 닿은 뒤 서문시장과 동산을 지나 읍성 밖 남쪽길과 덕산동, 이천동, 대봉동을 거쳐 가창을 향했다. ‘현해탄을 배로 건너 부산서 밀양까지는 기차로 왔지만 그곳부터는 30여 명의 지게꾼을 동원해 짐을 지워 2박 3일 만에 대구에 도착했다. 밀양부터 청도 사이를 약 7리로 들었는데 그날 밤은 청도까지 도착, 팔조령 기슭의 한 주막에서 자게 되었다. 꾸불꾸불한 것이 염소 창자 같아 험한 고개로 유명하였다. 고개만 넘으면 계속 내리막이지만 25관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지게로 운반하자니 도무지 일이 진척되지 않아 대구에서 약 3리 떨어진 마을에서 또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오전 10시경에야 대구에 닿았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당시 대구 사람들은 대부분 읍성의 남쪽과 서남부 구릉지대에 살았다. 그런데 부산에서 건설돼 올라오던 경부철도는 경산 고모역에서 대구 남쪽으로 오지 않고 동쪽으로 빙 돌아 읍성 북쪽을 통과했다. 조선인들이 밀집한 남쪽 대신 북쪽으로 우회시킨 것은 순전히 일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일본인들이 대구에 몰려온 건 1903년 전후로 부산-밀양 간 철도가 준공된 시점이었다. 경부선이 개통되면 대구가 크게 발전할 것을 예견한 일본인들은 사전에 시가지 주변 토지를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일본인들은 주로 땅값이 싼 북쪽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됐고, 철도가 지나면서 상업 기능이 활발해지자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일본인들은 한뼘의 땅이라도 더 많이, 더 싸게 사들이기 위해 남문 밖에 철길이 놓이고 남산동에 역사가 세워진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남쪽 지역은 공연히 땅값만 급등했다가 떨어져 철도 발달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모습을 잃은 대구의 중심 대구역 1904년 1월 북문 밖에 경부철도 남부공사건설사무소가 설치돼 공사가 본격화하자 공사 관계자와 기술자, 상인들이 대구로 몰려들었다. 공사가 한창이었던 그해 여름에는 일본인 1천500여명이 거주하기도 했으며 그 가운데 800여명은 공사가 끝난 후에도 대구에 남아 경부선을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전개했다. 경부철도 건설로 대구는 일약 핵심 경제도시로 떠올랐으나 초기 모습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1904년 건설된 임시 대구역사는 오두막 형태로 1913년 신축될 때까지 유지됐다. 역 앞은 철도원 주택과 일본식 여관 한두 곳이 자리를 잡고 있었을 뿐 사방이 풀밭이었다. 새로 들어선 대구역사는 목조 2층으로 일본-서양 절충형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지방 철도역 가운데는 부산, 신의주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역 앞의 넓은 광장은 중앙로와 태평로가 만나는 곳으로 대구시민들과 20세기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각종 민중집회와 축제, 선거유세 때 가장 먼저 꼽히는 장소가 대구역 광장이었다. 대구를 드나드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별하는 추억을 시민들에게 남겼고 친구, 연인과 약속 장소로도 그만이었다. 품팔이꾼과 지게꾼, 노숙자 등이 애환을 나누는 곳이기도 했다. 광장은 대구역이 2002년 롯데백화점 민자역사로 바뀌면서 시민들의 품을 떠나고 말았다. 1978년에 지어진 역사가 아무리 낡았다고 해도 광장까지 통째로 기업에게 넘기는 일을 시민들이 얼마나 공감했을까. 광장 없는 도시가 돼 버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예산상 이유로 대구의 중심을 포기한 행정의 근시안적 태도가 더없이 아쉽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09년 11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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