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2) 북성로…도시와 상업의 중심이 되다 -1203-

思美 2010. 4. 1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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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2) 북성로…도시와 상업의 중심이 되다
대우빌딩에서 내려다본 북성로의 현재 모습과 일제강점기 때 모습. 읍성을 무너뜨리고 낸 길은 곧고 넓게 동서로 뻗어 오랫동안 대구 상업의 중심지가 돼 왔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1904년 경부철도 개통과 대구역 건립 후 읍성의 북문(공북문)과 동문(진동문) 밖에 일본인 거주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읍성 철거 후 일본인들은 북성로를 넘어 점차 구 읍성 내부까지 세력을 넓혔다. 한국인들은 읍성의 남문(영남제일관)과 영남대로 주위에 밀집해 있던 구 근거지를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으로 밀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시대 대구는 도심을 사이에 두고 북동에 일본인이, 남서에 한국인이 물과 기름처럼 영역을 나누고 살았다.

◆일본인 거주지와 상가 중심의 개발

도시의 개발은 철저히 일본인들을 위해 진행됐다. 시가지 간선도로 건설과 확장, 상`하수도 개설 등은 도심 북쪽에 치중돼 현재도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북성로에서 동쪽으로 동인동과 삼덕동, 서쪽으로 시장북로와 도원동까지는 그런대로 반듯한 길이 나 있는 반면 남쪽 지역은 여전히 미로 같은 골목이 벌집처럼 존재하고 있다. 현재는 과거 위에 존재한다는 역사의 이치가 도시 발전에서도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1937년 3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대구의 시가지 계획령이 고시됐다. 대구의 가로에 제대로 질서가 잡히고 가로 폭이 넓어진 계기였다. 이미 개통된 중앙로와 새로운 십자도로를 이룰 동`서신로(현재의 국채보상로), 태평로와 연결되는 가로, 반월당에서 동쪽으로 뻗은 대로(달구벌대로) 등도 이때 계획된 것이다.

대대적인 시가지 정비는 도심의 면모를 바꾸었다. ‘대구역 광장에서 남으로 달리는 중앙통은 시가지를 동서로 양분하고 있다. 부영버스와 택시가 끊이지 않고 집산하고 있는 역 광장의 양측에는 공회당과 상공장려관이 대구의 표현관으로 위용을 나타내고 있다. 대구역 앞의 중앙통, 금정(태평로) 일대에는 자동차회사, 여관, 운송점, 토산물점, 음식점 등이 여객을 상대로 영업이 성하였다.’(1937년 대구부교육회)

하지만 남서쪽의 한국인 밀집지역은 그대로 방치됐다. 인구가 가장 많던 남산정(남산동)은 물론 19세기 말 대구에서 가장 환경이 깨끗한 동네로 꼽히던 명치정(계산동)조차 비만 오면 하수구가 넘치고 진흙탕이 돼 도시라고 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남산정에는 수천호가 몰려 살았으나 소방차가 드나들 도로조차 변변히 없어 불이 나면 고스란히 전 재산을 잃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일제는 1918년 대구에 상수도를 개설한 이래 1925년과 1939년 두 차례에 걸쳐 상수도 확장공사를 시행했다. 그 결과 일본인들과 일본군인들에게는 깨끗한 수돗물이 풍부하게 제공됐지만 한국인들에게 급수 혜택은 요원한 일이었다.

◆자동차의 등장과 상업 발전

일제가 갈수록 도로를 새로 내고 확장한 것은 사람과 물자, 특히 자동차의 이동을 위해서였다. 사람이 걸어다니거나 우마차가 지나는 길이라면 노선이나 폭이 사람살이의 모양대로 나게 마련이지만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곧고 넓어야 했다. 대구에 처음 자동차가 등장한 것은 1912년의 일이다. 그해 11월부터 대구에서 포항 사이를 격일제로 다니던 합승자동차였다. 1917년에는 창녕, 1918년에는 고령과 충주, 1919년에는 안동까지 정기 노선이 운행됐다.

대구 시내를 다니는 버스는 1929년 7월에 처음 선보였다. 30인승 3대와 24인승 20대가 배차됐다. 인력거나 마차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시절에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는 버스는 사람들에게 신기함 자체였다. 그때 이미 대구에 자동차 학원이 생겼으니 향후 급증할 운전사 수요를 감안한 것이었다.

시내버스 노선은 지금에 비할 것도 없이 짧았다. 대구역에서 일본군 진영(대봉동 미군부대)을 잇는 3.8㎞, 달성공원에서 경대병원을 잇는 4.8㎞가 도심을 다녔다. 가장 긴 노선은 도심과 달성군 화원을 잇는 15.5㎞ 구간이었다. 이 역시 철저히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철도와 도로 교통의 발달은 상업의 발전을 부른다. 특히 도심에서 대구역 일대로 상가가 발달해 북성로와 중앙로, 서문로가 중심이 됐다. 철도는 농산물과 생필품의 신속한 공급이라는 혜택을 안겨줬다. 이는 곧 정기시장에서 상설점포로 상업의 형태가 바뀜을 의미한다. 북성로에는 특히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상점이 많았다. 당시로는 고층인 4층의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과 이비시야 백화점이 들어섰고 야채시장과 수산시장, 미곡시장이 잇따라 개설됐다. 지방의 소매상들을 상대로 하는 일용품 도매상 역시 대구역에서 가까운 북성로와 서문로 일대에 밀집해 있었다.

◆신문물 거리에서 산업공구 거리로

일본인들이 대거 활동하던 북성로와 대구역 일대는 근대가 가져다준 새로운 문화와 물건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였다. 일제강점시대 북성로에는 백화점과 양복점, 목욕탕, 시계점, 장신구점 등은 물론 석유상, 철물점, 볼트판매소까지 다양한 상점이 영업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양복점은 북성로에만 여러 곳이 있었는데 1920년대까지도 사실상 일본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양복은 1881년 일본에 시찰단으로 갔던 김옥균 등이 처음 입은 이래 1900년에는 관리들의 관복을 양복으로 바꾸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이질적이었다. 특히 친일파들이 양복을 유니폼처럼 입고 다녀 반감도 컸다. 1910년대 북성로에 들어선 양복점들 역시 일본 관료들이나 군인들, 일부 상류층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다.

1920년대 들어 양복 입은 사람이 흔해지고 1922년 대구에도 한국인 기술자가 운영하는 양복점이 생기면서 양복은 점차 일반인에게 퍼졌다. 처음 양복점을 낸 사람은 일본서 양복기술을 배운 김성화씨다. 기술자가 드물고 양복지도 귀하던 시대이다 보니 양복 한벌 가격은 100원을 넘기도 했다. 쌀 한가마 값이 5원을 밑돌던 때였으니 서민들은 입을 엄두를 못냈다. 1930년대 들어 양복지 수급이 원활해지면서 북성로와 서문로 일대에 20개가 넘는 양복점이 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검정이나 밤색 양복, 조끼 주머니에 시계를 넣고 금시곗줄을 늘어뜨린 패션이 당시로서는 가장 멋쟁이 패션이었다. 이때는 여성들의 옷도 점차 양장으로 바뀌었고 학교 교복까지 서양식으로 정해져 옷 문화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향촌동과 맞닿은 북성로 지역은 요릿집과 술집, 여관 등이 밀집해 대구 최고의 번화가를 이루었다. 해방 후 각종 공구와 산업물품들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일본인 상점들을 대체하면서 북성로는 한강 이남에서 최대의 산업공구 거리로 성장했다. 북구 검단동 유통단지로 일부가 빠져나갔지만 북성로는 여전히 대구를 대표하는 거리로 남아 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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