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2)북성로 ③돈과 쌀이 모이는 곳 | |||||
◆엽전과 백동화 조선 말기의 대표적 화폐는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엽전이었다.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경제적 침투가 속도를 내면서 한국과 일본 화폐가 혼용되는 상황이 됐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엽전을 선호했다. 경부철도가 개통된 1905년을 전후해 대구에도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백동화가 유통됐지만 사용량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엽전은 가치가 낮아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비싼 물건을 사려면 수천 꾸러미의 엽전을 옮기기 위해 말과 마부, 호위인원까지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 매번 발생했다. 당시 일본 돈 2원은 엽전 1관문, 즉 1천닢 정도에 교환됐다. 따라서 1천원 규모의 거래(당시 논 1마지기 가격이 30원 정도)를 하려면 무려 500관문이 필요했다. 말 한 마리에 50관문, 엽전 5만닢 정도를 싣는다고 해도 10마리의 말이 필요했다. 경북 지역에서 대구로 와 이 정도 거래를 한 뒤 현금으로 결제하고 돌아가려면 말과 마부를 동원해 엽전을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만 몇 십원이 필요했다. 경부철도 공사 당시에는 대구 인근에 엽전이 부족해 부산이나 마산에서 사와 경북 지역으로 보내는 일도 자주 있었으니 엽전 사용으로 인한 불편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장악한 상권이 갈수록 커졌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백동화와 지폐 사용을 꺼렸다. ‘한국인에게 제일은행권 1원 지폐를 주면 아주 진기한 듯이 보다가 받지 않는다. 종이 인쇄물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한다. 따라서 엽전의 사용은 결코 줄지 않았고 엽전이 아니고선 물자의 매매가 막혔다. 수요가 증대되면 엽전 값이 뛰고 또 반대가 되면 하락한다. 12할5푼이 제일 쌌고 23할5푼이 최고였다. 일화 1원25전 또는 2원35전에 대해 한전 1관문, 즉 1천닢을 지불하는 것으로 이 시세는 매일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 한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이런 사정을 이용해 돈을 번 부류가 있었으니 바로 세금 징수 청부업자였다. 청부업자는 군 단위 지역의 조세를 한꺼번에 정부에 대납한 뒤 지방민으로부터 각각 세금을 징수했다. 어지간한 능력이 없으면 몇 십만원에 이르는 군의 조세를 한번에 마련할 수도, 서울로 옮길 수도 없었기 때문에 군수나 지방 유지가 청부업자를 맡는 게 보통이었다. 이들은 대납과 그에 드는 비용을 이유로 지방민 개인이 낼 돈의 2배까지 거둬들이기도 했으니 돈놀이보다 훨씬 이문이 많았다. ◆경제가 예속되다 경부철도가 개설되면서 대구 경제는 부산과 일본 경제권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류가 부산을 거쳐 대구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부철도 통과역 가운데 대구가 가장 큰 도시로 발전할 것을 예견한 부산의 일본인들도 때를 맞춰 대거 대구로 이주해왔다. 철도 공사가 한창이던 1904년에는 일본인 1천500여명이 대구역 주위에 거주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800여명은 철도 개통 후에도 대구에 남아 상업활동을 계속하면서 대구 경제권을 장악해나갔다. 대구에 최초의 은행이 들어선 것도 이때다. 일본계 상업은행인 제일은행의 출장소가 1905년 북성로 남쪽 대안동에 문을 연 것이다. 은행이 들어선 이유는 한국의 엽전을 일본인이 사용하는 신화폐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일본 신화폐는 1904년 철도공사가 진행될 때부터 통용돼 일본의 군사·상업 자금을 빨아들이는 역할을 했다. 제일은행은 191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귀속되고 일반 상업은행으로 돌아갔다.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구는 일본의 오사카, 교토 등과 직접 교류하기 시작했다. 역할은 늘어나는 한국의 소비를 일본 제품으로 공급하는 대신 한국의 원자재를 일본으로 가져가는 기지였다. 부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일본 경제권에 더욱 예속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구부사’를 보면 1911년부터 1939년에 이르는 동안 대구지역의 대일무역 비율은 89.6%였으며, 대구상공회의소 통계에 따르면 1933년부터 1937년까지 5년 동안 대일무역의 평균 비율이 98.9%로 나타날 정도였다. 당시 일본으로 수출하는 주요 품목은 쌀과 생사(生絲)였다. 낙동강 유역이 거대한 쌀 생산지인 동시에 양잠지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대구에 정미공장, 생사공장 등을 건설해 1차 가공한 제품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나마 사과가 지역 수출의 7%를 차지한 것이 눈에 띈다. 반면 대일 수입품은 잡다한 완제품이었다. 인조견 같은 직물이 가장 많았고 기름이나 철물 등의 품목도 많았다. 싼 값에 생사를 내주고 질 낮은 인조견을 일본에서 수입해 써야 하는 게 당시 대구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쌀을 주고 조로 연명하다 쌀은 중요한 수탈 대상이었다. 일제는 수리 정비나 산미증식계획 등을 통해 쌀 생산량을 늘리는 동시에 일본으로의 반출량도 늘렸다. 애써 농사지은 쌀은 내주고 만주에서 들여온 조로 연명하는 식민지인의 설움은 일제강점기 후반으로 갈수록 더해졌다. 일제강점기 한국 농민의 곡물 소비량을 보면 1920년에 쌀 32.2%, 보리 21.6%, 조 17.3%, 콩 9.5% 등으로 이미 많은 쌀을 빼앗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에는 쌀의 비율이 26.2%까지 떨어진 반면 조의 비율은 19.4%까지 늘어 잡곡으로 생계를 잇는 비참한 지경에 놓였다.(대구시사) 일제는 쌀을 빼가기 위해 은행과 창고를 이용했다. 일본은 1906년 대구농공은행을 설립하면서 밖으로는 지방농공업 발전을 위해 농공업자에게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일본으로 수출할 쌀을 수집하고 농촌에서 고리대를 통해 농지와 농산물을 착취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담당하기 위해서였다. 대구농공은행은 1918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흡수됐다. 일제는 대구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기 위해 1917년 대구곡물상조합을 만들어 독점적인 쌀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대안동에 들어선 대구미곡거래소는 창고에 있는 쌀을 선물거래 형태로 경매했는데 한국인 부호와 지주들을 파산하게 만드는 투기장이나 다름없었다. 거래하는 달 말일, 한달 후, 두달 후를 기준으로 벌어지는 경매는 잘만 하면 일확천금의 차익을 가져다주지만 일본인이 주도한 만큼 한국인이 큰돈을 만지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쌀 시장으로 인해 대구의 갑부들이 거의 망하는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투기를 즐기는 갑부들이 여기에 미쳐 날마다 화투장을 뒤져 점을 치고는 이곳으로 모여 샀다 팔았다 했다. 이는 일본인들이 교묘히 대구 부자들의 재산을 빼내기 위한 술수였음에도 투기에 한 번 빠져들면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는 지경에 놓였다.’(대구이야기, 매일신문 1992년 10월23일자) 조선식산은행은 일본으로의 쌀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1930년 북성로에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를 창설했다. 이 회사는 조선식산은행의 풍부한 자금으로 한국인이 경영하는 창고들을 매수해 지점으로 삼아 1940년께에는 전국에 7만8천평이 넘는 창고를 가졌다고 한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09년 1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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