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매일신문)

[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24>동성로-(1)대구 발전과 함께한 100년 -1217-

思美 2010. 4. 1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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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24>동성로-(1)대구 발전과 함께한 100년
 
▲대구역 방향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동성로. 이 길에 대구 100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1970년대 대구백화점 앞 거리 모습. 자동차가 귀하던 때였지만 동성로 일대는 차량들로 붐볐다.(대백 50년사)
동성로는 대구를 상징하는 명소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물론 외국인들조차 대구에 오면 팔공산과 동성로에 들러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구시민들의 동성로 사랑은 더욱 각별하다. 주말이면 대구시민 10명 가운데 1명은 동성로를 찾을 만큼 대구 문화와 상업, 만남과 축제의 중심지로 수십년 동안 명성을 이어왔다. 하지만 근대 이전 동성로 일대는 대구 읍성 내에서도 개발이 가장 뒤처진 곳이었다. 영남제일관 앞에 있던 동문시장이 1791년 현재의 대구백화점 주차장 쪽으로 옮겨오면서 상업 기능이 생기기도 했지만 주변에는 주택 몇 채를 제외하면 허허벌판이었다. 1907년 읍성이 헐리고 신작로가 난 이후 동성로는 발전을 거듭한다. 이후 100년 동안 대구가 발전해온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 바로 동성로다.

◆진영이 있던 한일극장 일대

19세기까지 대구는 경상감영 소재지로 영남의 중심 역할을 했다. 관찰사가 머무는 성내에는 당연히 군대가 있었고, 감영 내 중군이 경찰과 군사 업무의 핵심이었다. 방위군 성격의 군대가 읍성의 동쪽과 남쪽에 주둔했는데 동쪽 부대인 진영은 현재의 한일극장과 교보문고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영에는 병사 400명 정도가 주둔했는데, 지역 방위와 함께 각종 형벌 집행의 역할도 했다. 감영 남쪽의 부대는 남영으로 불렸는데 지금의 종로 일대다. 남영 역시 방위와 형 집행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었는데 양쪽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진영의 형 집행이 비공개라면 남영의 형 집행은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었다. 일반인들에게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기에는 상업과 주거 기능이 밀집해 있던 남영이 적절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영에서 이루어지는 형 집행은 비공개라는 점에서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더 공포의 대상이었다.

‘진영이 있던 무렵의 고목 몇 그루가 아직도 한일극장 옆과 뒤에 남아 있다. 이 고목들은 당시 교수대로 사용했다 하여 일반인들이 야간 출입을 매우 꺼렸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무시무시한 골목으로 낮에도 이 골목 다니기를 싫어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 고목을 베던 인부가 톱을 쥔 채 숨졌다. 원통하게 죽은 원혼이 덮어쓰여 횡사했다는 유언비어가 한때 파다하게 떠돌아다녔다. 하나 사실은 고목에 독소가 있어 나무를 베던 인부가 이 독소를 일정량 이상 체내에 흡수해 죽음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잃어버린 대구 명소-매일신문 1969년 6월4일자)

을사늑약으로 한국군이 해산당하자 진영 자리에는 수창동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가 옮겨와 주둔했다. 1916년 이천동 현 미8군 자리로 80연대가 옮겨간 뒤 한동안 비어 있다가 1938년 당시 가장 컸던 영화관 키네마 구락부(Cinema Club)가 들어섰다.

◆신작로가 생기고 시작된 변화

읍성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 난 동성로는 대구역 건너편 대우빌딩에서 중앙파출소까지 800여m 뻗은 길이었다. 지금의 국채보상로를 놓고 보면 활성화되기는 교동 방면인 북쪽이 훨씬 빨랐다. 대구역 덕분이었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이 지역에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교동시장 상권을 형성해갔다. 전쟁통에도 상거래는 활기를 띠었고 이후 다방, 빵집, 음식점 등이 줄줄이 문을 열어 1960년대까지 성업했다.

남쪽으로 동문시장이 장을 열었지만 발전은 더뎠다. 1917년 중앙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대구역에서 청도나 밀양으로 가는 지름길로 활용될 뿐이었다. 대구백화점 남쪽 옛 동인호텔 일대는 평탄한 지형이었다. 그곳에 돌무더기들이 하나둘 생겨 높아졌는데 전답을 일구기 위해 골라낸 돌들이었다. 특히 종로를 중심으로 모여 살던 중국인들이 야채 재배를 하기 위해 이 지역을 많이 개간했다. 문제는 이 돌무더기였다.

‘지금의 동인호텔 동쪽 일대 평야에 뱀산이 있었다. 평야에 쌓인 돌산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 돌무더기에 뱀이 우글거려 뱀산이라 불렀다. 몇 발자국에 한 마리씩 뱀을 볼 수 있을 만큼 크고 작은 뱀들이 득실거렸다. 이 뱀산엔 느티나무 고목이 세 그루 있었는데 가장 큰 노목은 벼락에 맞아 둥치만 험상스레 생겨 뱀들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1907년 일본인들 손에 의해 대구 성벽이 흔적 없이 철거될 때 돌 틈에 살던 뱀들이 이곳으로 많이 몰려든 것 같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뱀들은 차차 그 모습을 감추게 됐고 요즘은 대구 관내에 한 마리의 뱀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잃어버린 대구 명소-매일신문 1969년 5월21일자)

동성로의 남쪽 지역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발전의 단초를 마련한다. 1966년 한일극장이 영화관으로 재개관하고 1969년 대구백화점이 현재의 위치에 개점하면서 형성된 상권은 공평동 방향과 동아양봉원 방향, 중앙파출소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대구 상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달성군청 신설과 도시 확장

일제강점기 대구의 시세(市勢)는 변모를 거듭했다. 특히 1914년 일제가 시행한 부제는 대구의 형세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한일합방을 전후해 대구를 비롯한 도시들이 점차 규모를 넓혀가자 빈약한 재정으로 광역화하는 도시를 지탱하기 힘들어진 때문이다. 게다가 적은 재정을 넓은 지역에 쓰느라 주요 도시에 정착한 일본인들의 이익을 챙겨주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부제는 일본 거류민단이 조직돼 있던 대구 등 12개 도시에서 우선 실시됐다. 일본인들이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시켜 수탈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그 결과 대구는 중구 일원과 북구 칠성동 정도를 포함하는 작은 규모로 축소됐다.

대구부가 관할하던 27개면을 담당하기 위해 달성군이 신설된 것도 이때다. 대구부 외곽지와 현풍군을 통합해 달성군이 만들어졌고 청사는 현재 대구백화점이 있는 동성로에 들어섰다. 달성군청은 대구 도심에 있던 경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이나 대구부청(현 대구시청)에 비해 경비가 느슨해 1919년 만세운동 때 최종 집결지가 되기도 했다.

이후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가 계속 증가해 대구부 밖까지 세력을 넓히자 일제는 1938년 대구부의 행정구역을 크게 확장했다. 도시화로 인해 농촌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면서 세원(稅源)이 크게 늘어난 것도 확장의 필요성을 높였다. 이때 편입된 지역이 성북면의 침산동을 비롯한 4개 동, 달서면의 원대동을 비롯한 10개동, 수성면의 14개동 등이었다. 대구부의 면적은 단번에 11배로 확장됐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09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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