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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3월8일 서문시장서 거사…한달 내내 '만세'함성 |
1919년 만세운동이 대구에서 일어난 날은 3월 8일이었다. 1일에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으나 대구에 독립선언문이 도착한 것은 4일이었다. 대구 거사는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를 비롯해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교사 등이 주축이 돼 8일로 정해졌다. 대구의 큰 장날이자 토요일이어서 만세를 부르기 좋은 기회였다. 6일과 7일 계성학교 기숙사에 짚단을 쌓아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한 뒤 촛불을 켜 놓고 독립선언문 수백장을 등사했으며 자기 집에서 몰래 독립선언문을 베끼고 태극기를 만드는 이도 많았다. 일본은 지역 내 시위 발생을 막기 위해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사전에 잡아들였지만 거사는 막지 못했다.
8일 오후 3시쯤 서문시장에 만세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학생 등 200여명이 참가했고 시장 남쪽으로 들어오던 대구고보 학생 200여명은 일본 헌병기마대와 격투 끝에 합류하기도 했다.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열기가 오르고 군중이 800여명으로 늘어나자 만세 행렬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동쪽으로 향했다.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옥상에서 총을 겨누던 일본 경찰조차 도망갈 정도로 군중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종로를 지나 동성로로 접어든 시위대는 달성군청 앞(현 대구백화점 부근)에서 일본군 80연대에 막혔다. 총검을 겨눈 일본군과 경찰들은 시위대를 마구 때리고 체포했다. 이때 붙잡힌 사람만 157명이라고 한다. 9일에는 계성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의도가 적발되기도 했으나 10일 대구고보와 계성학교 학생, 시민 등 수백명이 남문 밖 시장에서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30일에도 남문시장에 3천명이 모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는 등 3월 내내 대구는 만세 소리로 가득했다. 수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혔고 대구고보,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에는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대구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보다 늦었지만 지속적으로 전개됐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
기사 작성일 : 2009년 12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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