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5>동성로 ②백화점과 극장 그리고 만남 | |||||||||||
◆대구백화점, 모험을 하다 1944년 옛 동인호텔 부근 15평 규모의 대구상회를 인수한 구본흥 대백 회장은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매출을 급격히 늘려갔다. 대구상회가 소문나자 현재 대구백화점 자리에 있던 유복상회의 전유복씨가 구 회장에게 인수를 제의했다. 연로한 탓에 운영이 어려워지자 적당한 인수자를 찾던 전씨는 대구상회의 10배가 넘는 200평 매장을 인수할 형편이 되지 않던 구 회장에게 3년 분할상환이라는 조건을 내밀었다. 대구백화점이라는 상호가 처음으로 사용된 계기였다. 한국전쟁이 터지며 백화점 운영이 어려워지자 구 회장은 교동 쪽으로 백화점을 옮기고 백화점은 대백가구의 전신 대구가구공예사로 전환했다. 1962년 향촌동 1번지로 옮긴 대구백화점은 100여평에 목조 2층 건물이었으나 일대에서 제법 큰 규모였다. 이곳에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한 구본흥 회장은 1960년대 중반 모험적인 결단을 내렸다. 상권이 거의 형성돼 있지 않던 대구가구공예사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10층짜리 본점을 짓기로 한 것. 초가집만 드문드문하던 당시 주변 여건을 두고 우려의 소리가 많았다. 게다가 1966년 공사를 맡아 시작한 중소업체가 경험이 부족해 굴착작업 도중 주변의 주택을 무너뜨리는 사고까지 생기자 대구백화점의 성공을 점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몇 차례 설계를 바꾸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69년 12월 26일 개점했다. 지하에는 식품 매장과 다방, 싸롱 등이 들어왔고 1층은 잡화, 2층은 의류, 3층은 가전제품 매장이었다. 4층 이상은 사무실로 일부를 임대했으나 규모가 워낙 컸던 탓에 상당수는 비어 있었다. 대구백화점은 1969년 7월 1일자 매일신문에 ‘금성제품 대전시회’ 광고를 통해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개점을 알린 뒤 그해 9월과 10월 매일신문에 점포 및 사무실 임대 광고, 사원모집 공고를 잇따라 내면서 홍보를 통해 취약한 상권을 살리는 전략을 택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구백화점이 동성로에 문을 연 뒤 대구에 대형 복합상업건물이 잇따라 들어섰다. 1972년 동아백화점, 1973년 신세계 대구지점이 개점하면서 백화점 업계는 3파전을 피할 수 없었다. ‘대구은행이 「대구의 돈은 대구은행으로」라는 캠페인을 펴는 것과 보조를 맞춰 대구백화점은 「대구시민의 쇼핑은 대구백화점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지역민의 애향심에 호소하고자 한 것이었다.’(대백50년사) 결국 신세계 대구지점은 3년 4개월 만인 1976년 12월 철수하고 대구와 동아 두 백화점이 시장을 양분, 30년을 흘러왔다. 1980년대 대구의 백화점 매출액은 600억원 가까운 규모로 부산이 200억원도 안 되는 데 비하면 대단한 성세를 누렸다. ◆사람들을 불러모은 극장들 경상감영의 진영에 이어 일본 수비대가 주둔하던 자리에 1938년 키네마 구락부(cinema club의 일본 발음)가 들어섰다. 3층 높이의 키네마 구락부는 당시로는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어마어마한 시설이었다. 해방이 되자 극장은 경상북도 소유로 넘어갔고, 1945년 9월에 해방 후 최초의 연극 ‘깃발 흔들던 날’을 시작으로 여러 편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1953년 전쟁통에 무너진 서울 국립중앙극장을 대신해 국립중앙극장으로 지정됐다. 이때 무대가 확장되고 좌석도 1천300석 규모로 늘었다. 1957년 서울에 국립극장이 다시 개관하자 개인에게 불하돼 한일극장이 문을 열었다. 이후 40년을 대구 대표 영화관이자 동성로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대구 사람치고 한일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구 최초의 극장은 1907년 태평로에 들어선 니키시좌(錦座)로 1920년까지 대구에는 유일한 대중오락장이었다. 대부분 일본인들을 위한 노래와 춤, 연극이 공연됐으나 우리 극단들의 공연도 가끔씩 열렸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은 1921년 향촌동에 들어선 만경관이었다. 이후 대구좌(대구극장), 호락관, 대송관(송죽극장), 영락관(자유극장), 키네마구락부 등이 잇따라 설립되면서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동성로는 중앙로와 함께 많은 극장들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상권이 덩달아 커진 건 당연한 일이다. ◆빵집과 다방, 음식점 1970년대 이후 대구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만남을 약속하는 장소는 동성로였다. 대구백화점과 동아백화점 입구, 한일극장 앞은 누구나 알고 있는 장소였기에 시간만 정하면 만나는 데는 틀림이 없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별다른 볼일이 없으면 동성로 주변의 상가로 향했다. 학생과 젊은이들은 동성로에 나올 때마다 빵집, 청·중년들은 다방을 들락거렸다. 1970년대 동성로에는 유명한 빵집이 많았다. 이비시야 백화점이 있던 건물 1층에 문을 연 런던제과, 한일극장 건너편의 뉴욕제과, 송죽극장 앞 뉴델제과 등 3곳은 매출이 어지간한 중소기업 이상일 정도로 붐볐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손님들의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11월부터 작업을 시작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1980년대 들어 다양한 음식점과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서며 빵집들의 영업이 점차 어려워졌고 지금은 빵을 사기 위해 들를 뿐 만남을 이어주는 장소로서의 기능은 잃고 말았다. 다방 역시 빵집들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1970년대 대학생이나 젊은층이 많이 찾는 음악다방은 DJ박스와 빼곡한 레코드판으로 상징됐고, 중년들과 예술인들이 찾는 다방들도 주말이면 빈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성업했다. 이 역시 상권의 변화 추세를 따라가지 못해 쇠락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1980년대 이후 동성로는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자리 잡으며 상권 역시 변모해 대형 브랜드 매장과 군소 옷가게들,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즐비해졌지만 만남의 장소로서 기능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09년 12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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