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도심]<27>포정동 ②감영 객사와 약령시 | |||||||
◆임금과 손님을 모시는 객사 경상감영은 크게 봐서 세 부분으로 나눠졌다. 감사가 있는 감영공간과 객사, 대구부아(府衙)로 구별된다. 감영공간은 감사가 일하는 정청공간과 부속관원들이 사용하는 공간, 군사시설 등으로 구성됐다. 현재 경상감영공원 내에 선화당과 징청각 등이 남아 있으나 선화당 앞과 옆에 있던 군사시설인 중영과 진영은 흔적이 없다. 감영 앞쪽으로 진입공간과 부속공간이 있었고 뒤쪽으로 객사가 있었다. 객사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공간으로 외국의 사신에서부터 고을을 찾은 손님에 이르기까지 숙소로 제공했던 곳이다. 한편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 국가 경축일에 지방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절하는 의식을 진행하며 임금을 가까이 모신다는 상징적 기능도 갖고 있었다. 경상감영 객사는 중앙건물인 달성관과 좌우에 팔달헌과 대슬헌, 주흘원 등의 건물로 구성됐다. 이곳에서는 경상감사가 임금을 향해 제를 올렸으니 그 엄숙함은 일반 고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객사의 동북쪽 모퉁이에 금학루(琴鶴樓)라는 루가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는 존재했으나 18세기 들어 없어진 것으로 나타나는데 금학루는 대구십경(十景)으로 꼽힐 만큼 명승지였다. 당시 대구부 내에 있던 금호라는 이름에 학이 춤추는 듯한 루의 모양을 따 금학루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객사는 대구 시장의 형성과 발전에도 의미를 갖는다. 대구장은 경상감영이 들어선 17세기 이후 처음에는 객사 북쪽에서 열렸다. 장은 감영이 안정되고 관련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커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팔공산을 넘어 신령으로 통하는 작은 길밖에 없어 얼마후 서문 밖 공지로 옮겨갔다. 성주, 칠곡, 고령 등으로 이어지는 요지였으니 오늘날의 시장북로 부근이다. 18세기에는 동문밖에 장이 열려 경산, 하양, 청도 등과 연결했다. 따지고 보면 감영과 객사가 대구 시장의 번성을 이끄는 계기가 된 것이다.
◆객사 마당에서 열린 약령시 대구 약령시는 효종 9년인 1658년 창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증적인 자료는 없지만 ‘경상감영 400년사’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약령시 발전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17세기 후반 대동법이 경상도에서 실시된 점, 감사의 유영지가 대구에 정착한 점, 대구권 시장의 발전 등이다. 이 가운데 대동법 실시가 약령시 창시의 이유가 된 점이 흥미롭다. 17세기 들어 전국적으로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지방 특산물이 쌀로 통일됐다. 대신 왕실에서 필요한 물품은 공인들이 조달했는데 이들이 급성장하면서 화폐유통 촉진, 신분질서 와해 등 사회 변화가 컸다. 이와 함께 왕실에 공급되는 물품들의 품질이 급격히 떨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약재에 문제가 많았다. 17세기 중반 들어 충청도 등지에서 대동법이 실시돼 한약재 공급이 줄어들자 아직 대동법이 실시되지 않던 경상도에 진상의 부담이 가중됐다. 당시 경상감사였던 임의백은 한약재 진상과 관련해 조정으로부터 심하게 추궁당했다. 1658년 1월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자. ‘내의원 도제조가 효종에게 말하기를 왕실용 약재 중 태반이 경상도에서 보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 진상품 중 상당 부분의 품질이 떨어져 되돌려보낸 후 상납을 독촉했음에도 아직 오지 않고 있습니다. 약고에는 일부 약재가 떨어졌습니다. 나라에 바치는 일보다 막중한 것이 없을진대 이처럼 소홀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를 추궁하고 미수된 약재를 당장 상납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여 왕의 윤허를 받았다.’ 왕실로부터 최우량 한약재 진상을 독촉받은 임 감사는 새로운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약령시 창시의 주된 이유로 보인다. 감영 객사 마당에 시장을 만든 것도 진상용 약재 수집의 목적이 컸기 때문이다. 약령시(藥令市)의 당초 명칭이 영시(營市)로 전해지는 것도 임 감사가 장을 열고 품질이 우수한 한약재를 넉넉한 값에 사들여 왕실에 진상한 데서 비롯됐다.
◆객사 파괴와 약전골목 19세기까지 대구 약령시는 발전을 거듭한다. 1904년의 기록을 보면 매년 2월과 10월에 한 달씩 열리는 영시에 전국에서 모여드는 구매상이 무려 1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얼마나 성황을 이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08년 약령시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 발생한다. 일본인들이 감영 객사를 무상으로 교부받아 파괴하려 든 것이다. 1907년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객사도 폐허가 됐으나 그해 약령시는 관찰사가 주선하는 우여곡절 끝에 원래의 자리에서 열렸다. 하지만 북성로와 태평로 일대를 자신들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일본인들은 군대까지 동원해 객사를 파괴하고 말았다. ‘1908년 대구거류민단에서 객사를 한국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교부받아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자 아무리 순박한 대구사람이라도 이 일에는 반대, 항의하였고 마침내 불온한 행동도 일어났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동서남북 4문의 문짝 또는 벽면에는 ‘객사를 파괴하려는 민단을 우리 모두 일어나서 저지하자’라는 뜻의 격문이 붙었다. 밤에는 수백명의 민중이 모닥불을 피우며 객사를 지켰다. 그러나 대구 수비대 1개 대대가 출동하여 객사를 포위하고 민중의 퇴거를 명하며 방비하는 사이에 파괴작업을 강행하였다. 그 후에 객사 주위의 민가를 사들여서 도로를 개설했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약령시는 결국 옮길 곳을 찾아야 했고, 그렇게 새로 터를 만든 곳이 지금의 남성로 약전골목이다. 1908년 가을 추령시는 250년의 역사를 옛터에 남기고 남성로에서 개장했다. 약령시는 금세 활성화돼 4년째인 1911년에 ‘내왕하는 사람들의 어깨와 수레가 맞닿아 지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한약을 지키려는 노력은 식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약전골목 거상 김홍조 약령시가 열리는 동안 시장을 주도한 세력은 객주와 의원이었다. 객지에서 온 상인들의 모든 행위를 주선한다는 의미에서 객상주인(客商主人)으로 불린 객주는 도매업과 창고업, 금융업 등을 겸했다. 약재 생산자와 수집상이 가져온 약재를 수매하고, 약재를 맡아 창고에 보관하고, 원매자에게 판매하기도 하며, 현금이나 어음으로 대금을 결제하고 융자도 해주며, 침식까지 제공하는 등 상행위 전체에 관여했다. 객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가 김홍조였다. 대구약령시 하면 김홍조라고 할 정도로 그의 이름은 전국에 퍼져 있었고 중국에서까지 알아줄 정도였다. 현재 약전골목 네거리 구 대남한의원 일대에 자신의 이름을 건 ‘김홍조 건재약방’이란 간판을 내걸고 6개의 약재창고와 여관까지 경영한 거상이었다. 당시 그의 약방에는 전무와 지배인, 과장 등 종업원만 40여명이었다. 경영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고 신용이 두터워 빠르게 영업을 확장, 서울 남대문 밖과 중국 상하이를 제외하면 그만한 상인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의 상술은 특이했다. 필요한 약재만 사는 것이 아니라 약을 팔겠다는 사람이 오면 무조건 사는 것이었다. 재고가 몇만근씩 있는 약재라도 다시 1만근이건 2만근이건 사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대금 결제가 흔히 몇달 뒤 또는 1년 후불이었는데 반해 김홍조는 어음으로 제때에 대금결제를 했고, 그의 어음은 서울에서도 현금 이상으로 신용했기 때문에 약재가 그에게 모일 도리밖에 없었다. 당시 그 집에서는 일반 거래 외에 원거리에서 편지 주문에 의해 소포로 보내는 약재만 매일 한 수레씩 실려 나갔으니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대구약령시, 홍순두) 소포는 국내에만 부쳐지는 게 아니었다. 일본 오사카, 중국 대련 등 일본과 중국까지 거래가 이뤄졌다. 김홍조와 같은 객주 영업 형태는 지금도 대구 약전골목과 서울 경동시장 등에 일부 남아 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10년 01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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