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29)덕산동-①민중의 애환과 함께 하다 | |
#반월당 석빙고 기념비만 남아
◆진흙에서 돌로 바꾼 석빙고
석빙고(石氷庫)는 말 그대로 돌로 만들어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다. 지금이야 가정마다 냉장고가 있지만 더위를 고스란히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과거에는 여름에 얼음 찾기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관찰사나 지방 관리, 부호들은 석빙고를 만들어 여름 더위를 식히는 데 사용했다. 지역에만 해도 경주, 안동, 청도, 현풍 등지의 석빙고가 지금까지 남아 보물로 보존되고 있다. 대구는 경상감사가 상주한 곳이니 당연히 석빙고도 있었을 터. 남산동 아미산 아래 반월당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감영이 들어서기 전 대구가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사실은 석빙고가 없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당초 대구의 얼음 보관 창고는 돌이 아니라 흙으로 쌓았다. 이름도 빙실(氷室)이었다. 당연히 기능은 오래 가지 못했고, 몇년마다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고 부역을 시켜 고치는 일을 되풀이했다. 관리와 일부 양반의 한철 호사를 위해 백성들이 고역을 겪는 형국이었다. 대구 석빙고 건립을 주관한 판관 유명악의 공을 칭송한 석빙고비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빙실은 백성의 근심이요 참으로 폐단이었다. 삼년마다 한 번씩 백성의 재력을 써서 고쳐야 했다. 진흙과 짚 대신에 석재로 대신하려 해도 많은 비용이 문제였다. 다행히 판관 유명악이 민폐 개혁을 위해 감영미 800섬을 원조받아 공사를 시작하니 처음은 돌을 쌓아 바닥을 만들고 무지개형으로 지붕을 덮으니 대략 9칸으로 일을 마쳤다. 맹춘(孟春, 1월) 중순에 시작하여 수하(首夏, 4월) 그믐에 완성하였다.’ 석빙고의 운명은 경상감영과 다르지 않아 대구읍성이 무너진 1907년 일제에 의해 헐리고 말았다. ‘산에 난 돌을 깎아 우리의 큰 근심 덜었네…빙실은 무지개를 이루었고 백성은 오래도록 편안하리라…’라고 적힌 기념비만 겨우 남아 현재 경북대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동학 창시 최제우 공개 참형
◆관덕당 공개사형장
경상감영 남문은 종로쪽 남영에 주둔한 군대가 지켰다. 이들은 남문 밖에 훈련장을 두고 평상시 훈련을 했다. 지금의 동아쇼핑 뒤쪽으로, 1749년 경상감사 민백상이 무과시험장을 건립하면서 세운 관덕당(觀德堂)이었다. 넓은 연병장이 있었고 한쪽에서는 중죄인을 공개 처형했다. 한일극장 인근에 있던 진영의 사형장에서는 대부분 비공개로 처형됐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많던 이곳에서는 교화와 질서 유지의 목적으로 형을 공개 집행하는 일이 곧잘 이뤄졌다. 정부의 실정과 지방의 문란함이 갈수록 심화되던 19세기에는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공개처형하는 일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대구에서도 관덕당에서 공개처형된 기록이 19세기에 집중돼 있다. 을해년(1815), 정해년(1827), 기해년(1839), 병인년(1866) 등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일어날 때마다 이곳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1864년 3월에는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가 관덕당 뜰에서 참형됐다. 프랑스 선교사로 대구에 온 안세화(드망즈, Demange) 주교가 대구에 대해 ‘매우 작고 의심을 받아 20~30명밖에 성사를 집행할 수 없는 곳’이라고 초기 인상을 남길 정도였으니 대구 백성들의 삶 속에는 공포정치로 인한 살벌함이 가득한 시기였다. 20세기 초에는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던 애국지사들을 화적으로 몰아 집단으로 처형하는 일이 적잖았다. ‘1906년 봄, 2일간 계속해서 60명가량을 교살죄로 처형했다. 죄인은 대개 화적이라 하여 민가에 불을 질러 약탈과 살인을 하였고 무리를 지어 흉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첫날은 20명, 그 이튿날에는 40명 정도가 교살됐다. 구경꾼은 한`일인으로 몇백명이나 됐다. 두 개의 소나무를 통째로 맞추어 양쪽으로 세우고 그 위에 직경 두세 치, 길이 두 칸이나 되는 튼튼한 통나무를 얹어 마치 대들보처럼 엮는다. 거기에 죄인 4명을 매달았다. 새끼줄을 대들보에서 늘어뜨리고 죄인은 지게를 발판으로 올라간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음인지 온순한 것이 그때는 모든 기력을 잃고 있었다. 턱에 줄이 걸리면 발판이 된 지게를 벗겨 힘들이지 않고 목을 조이게 한다. 7, 8분에서 12분 정도 지나면 숨이 끊어진다. 매다는 데 줄이 끊어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체념한 듯 다시 온순하게 지게에 올라갔다. 참으로 참혹했다.’(대구이야기, 가와이 아사오)
#시대 아파한 청춘들 아지트
◆7080의 열정을 키운 학사주점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70년대와 80년대 학사주점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대학생들이 울분을 토로하고 민주화를 위한 싸움의 결의를 다지던 장소였다. 학사(學士)라는 간판을 내건 만큼 주인들도 대학생들의 열정과 얇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싼 술값에 안주를 넉넉히 건넸다. 이들 역시 민주화의 공로자라고 할 정도로 모두가 어려운 시대를 함께 껴안고 간 민중이었다. 1970년대 초반 경상감영공원 주변에 흩어져 있던 학사주점들이 대구백화점 인근과 봉산동 쪽으로 하나둘 옮겨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덕산동에 주점들로 가득한 학사골목이 생길 정도로 늘었다. 1980년대에는 막걸리와 파전, 빈대떡 등을 주로 파는 민속주점들까지 일대에 모여들면서 동성로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동력이 됐다. 밤이 되면 골목 사이로 터져나오는 젓가락 장단과 민중가요 노랫소리, 어깨를 걸고 좁은 골목을 지나는 학생들이 매일같이 변함없는 풍경을 만들었다. 학사골목에서 중앙로 건너편 YMCA 뒤쪽 염매시장에도 대학생들의 발길이 쉴새없이 몰려들었다. 도심에서 기습시위를 벌인 대학생들이 경찰의 손길을 피해 숨어들기 안성맞춤인 장소라 오후만 되면 각 대학의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 삼삼오오 찾아와 술잔을 기울였다. 밤늦게까지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기 일쑤였고 여차하면 옆 좌석의 손님들까지 가세해 열기를 달궜다. 이 가운데 곡주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술집이었다. 1970년대 초 정옥순씨가 문을 연 뒤 주인이 바뀐 지금까지 간판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이곳을 스쳐간 인물들과 그 속에 담긴 스토리는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다. 군사독재에 대항하던 시절부터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으로 이어지는 동안 젊은이들의 분노와 슬픔, 기쁨과 희망을 온전히 공유한 독특한 공간이었다. 술집 이름 곡주사는 손님들 사이에 ‘유신시대를 통곡하고 저주하는 선비들이 모인다’는 뜻의 哭呪士로도 해석됐다. 정씨는 수많은 운동권에게 술을 싸게 팔고 토론할 장소를 제공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일도 여러 차례여서 ‘대구 운동권의 대모’로 불리기도 했다. 덕산동 학사골목과 염매시장 주점들은 달라진 문화지형과 개발논리에 밀려 제모습을 잃었지만 그곳을 지나는 7080세대들에게는 언제나 ‘시대를 아파하고 청춘을 불태웠던’ 공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10년 01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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