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 (28)포정동 ③근대 정치의 중심지 | |||||
◆빼앗긴 감영 주변에 들어서는 기관들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먼저 점령해야 할 공간이었다. 갑오개혁으로 감영이 폐지되고 대구부가 대구군으로 바뀌자 일제는 통치기구인 대구이사청을 선화당에 세운다. 그리고 국권을 빼앗자 경북도청으로 바꿔 식민통치의 기구로 삼는다. 감영만으로는 공간이 부족해 감영 앞과 동쪽의 부속 건물들을 모두 헐고 새 청사를 건립했다. 1966년 북구 산격동에 새 도청사가 들어서고 이어서 사용하던 공무원교육원까지 이전하자 1970년 마침내 감영의 옛 모습을 일부 되찾아 중앙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됐다. 감영을 뺏기고 정치의 중심지 기능이 활발했던 지역이 감영을 되찾자 기능을 잃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현재의 자리에 대구우체국이 신축된 건 1912년이다. 대구의 우편업무는 1903년 시작됐으나 초기에는 배달해주지 않는 체제였다. 우편물이 6일마다 도착하면 자신의 우편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수신인이 스스로 찾아가는 방식이었다. 이후 우편물이 매일 도착하자 집으로 배달해주는 집배(集配) 업무가 시작됐다. 우편 물량이 늘어 대구우체국 신청사를 건설한 후 북성로, 서문로, 서문시장, 중앙파출소 등에 우체국이 하나 둘 설치됐다. 대구에 근대적인 금융기관이 설치된 것은 1905년 일본 제일은행 대구지점이 최초로 1906년 설립된 대구농공은행과 함께 일제의 보호를 받으며 대구경북 일원의 금융을 장악했다. 금융기관들은 서문로와 경상감영 앞쪽으로 잇따라 들어섰다. 서문로쪽에 구 대구은행과 구 한성은행, 경일은행 등 상업은행들이 주로 문을 연 데 비해 감영쪽에는 조선식산은행과 조선은행 대구지점 등이 자리를 잡았다. 조선식산은행은 경상농공은행을 통합해 1931년 지어진 건물로 산업은행 대구지점을 거쳐 현재 근대역사박물관으로 변신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현재 하나은행 자리에 있던 조선은행은 지금의 한국은행처럼 화폐를 발행하는 중앙은행 역할을 했다.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폭파사건 1927년 10월 18일 오전 11시50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지점장 앞으로 선물 상자가 배달됐다. ‘벌꿀 6근이 들어 있음’이라고 적힌 상자에는 불붙은 폭탄이 들어 있었는데 화약 냄새를 맡은 일본인 간부가 급히 상자를 열어 뇌관을 제거했다. 하지만 선물을 배달온 이의 꾸러미에는 경북지사, 경찰부장, 조선식산은행 지점장 앞으로 보내질 선물 상자가 3개나 더 있었다. 일본 경찰들이 달려와 급히 은행 밖으로 옮기는 순간 폭탄이 폭발했다. 들키지 않고 제대로 배달됐다면 포정동 일대의 일본인 핵심지를 잿더미로 만들었을 상황이었다. 미처 뇌관이 제거되지 않은 2개의 폭탄이 도로에서 폭발하면서 주변의 유리창 70여장이 깨지고 일본경찰과 은행원 등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것이 의열단원 장진홍 열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다. 칠곡 출신의 장진홍은 19세인 1914년에 조선보병학교에 입대해 제대 후 광복단에 가입했으며 1918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교포 청년 100명에게 군사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3·1만세운동 후 귀국해 일제의 만행에 저항했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점차 친일 성향이 강해지는 국내 분위기는 그에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인 국제공산당원을 통해 폭탄 제조 기술을 배운 그는 일본인들과 광산, 도로 공사장 등의 인부들에게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도화선 등을 입수했다. 칠곡과 선산의 오지에서 시험 폭파까지 마친 후 경찰부장 사택과 경찰서, 도청, 은행과 법원, 형무소, 친일부호의 집 등 대구시내 9곳을 폭파 대상으로 정하고 이날 4곳에 대해 거사를 단행했다. 군 경력이 있는 일본인 은행 간부가 아니었으면 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할 일대 사건이 됐을테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선산으로 피신한 그는 다음 거사를 준비했지만 일본 경찰의 경계망이 좁혀지는 바람에 이듬해 2월 일본으로 숨어들었다. 장 의사의 뒤를 쫓던 일본 경찰은 일본에 있는 동생 장의환의 집 주위를 감시하던 중 그의 소재를 확인하고 체포에 나섰다. 격투 끝에 붙잡힌 그는 한국으로 호송되던 도중에 수차례 도주와 자살을 계획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이 장진홍 의사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장 의사는 취조 경관에게 “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본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호통쳐 경관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대구이야기, 매일신문 1992년 4월10일자) 사형이 확정된 후 일본인에게 죽음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장 의사는 1930년 6월 5일 35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장진홍 의사의 자결 소식이 형무소에 퍼지자 모든 재소자들이 “장진홍 의사 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감방문을 부수고 장 의사가 숨진 감방으로 몰려와 대성통곡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형무소 측은 경찰과 헌병을 총동원해 진압하며 그의 죽음은 자결이 아니라 병사라고 회유했으나 흥분한 재소자들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튿날 1천여명의 재소자들은 일제히 단식투쟁을 전개하면서 일주일간 농성했다.’(같은 글) ◆수인번호 264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을 수사하던 일본 경찰은 폭탄 배달 심부름을 온 여관 사환을 체포한 외에 상당 기간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다급해진 경찰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 인사들을 무차별 체포해 혹독한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체포된 이들 중에 이원록·원기·원일·원조 4형제가 포함돼 있었다. 4형제는 거사와 직접 연루되지 않았는데도 3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며 모진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가운데 이원록이 항일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다. 그가 호를 육사(陸史)로 바꾼 건 당시 수인번호였던 264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안동에서 태어난 육사는 대구 교남학교에서 공부한 뒤 1925년 의열단에 가입해 베이징 사관학교를 거쳐 1927년 귀국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그는 조선은행 폭파사건으로 인해 미결수 상태로 1년 반 넘게 옥살이를 했다. 장진홍 의사가 체포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일본 경찰은 그를 법정까지 몰아갔다. 일본 재판부 스스로 혐의가 없다는 판결문을 낸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으니 그간의 옥고는 식민지 애국 인사들로서는 피할 수 없는 가슴칠 일이었다. 이육사는 옥고로 인해 형제인 이원기가 불구가 돼 세상을 떠나는 슬픔까지 떠안아야 했다. 출옥 후 1931년 대구격문사건으로 다시 투옥된 그는 이후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해서는 육사란 이름으로 필명을 높이기 시작했다. 청포도, 광야, 절정 등 절창들을 발표하던 그는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갇힌 뒤 이듬해 1월 해방을 눈앞에 두고 옥사했다.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으니 문학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지사라고 할 수 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10년 01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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