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도심] <31>중앙로 | ||||||||
①반복되는 성쇠 ◆신작로가 난 뜻 1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민족에게는 망국의 설움이 시작된 때지만 강점한 일제에게는 지배와 수탈이 쉬운 식민지로 만드는 일이 필요한 시기였으리라. 1907년 대구읍성을 허물어 도시의 경계를 없앰으로써 자신들의 기반이던 대구역과 태평로 일대 가치를 높인 일본인들은 강점 이후 아예 도심 북쪽을 대구의 중심지로 재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913년 시구개정사업이다. 크고작은 길을 정비하고 거주지 환경을 새롭게 단장했다. 단, 모든 사업은 일본인들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됐다. 경상감영 북쪽을 장악한 그들은 동서로 정비구역을 넓혀 동인동과 삼덕동, 시장북로, 도원동까지 손을 뻗었다. 한국인들은 경상감영에서 서남쪽으로 자꾸만 밀려나갔다. 도심의 서남지역과 덕산동, 남산동, 달성동 등지의 내부 가로망이 지금껏 불규칙한 형태를 띠는 데에는 일제의 이같은 개발이 고착화된 탓이 크다. 1917년 일제는 대구역 앞에서 반월당까지 도심을 관통하는 중앙로를 개설했다. 도심에는 이미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종로와 감영 앞길이 교차하는 십자대로가 있어서 동서남북 통행이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중앙로를 다시 개설한 이유는 역시 일본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추정된다. 종로의 남쪽은 한국인들이 염매시장과 약령시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종로의 중간 지역에는 중국 화교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진출하기에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 대안은 새로 더 넓은 길을 뚫고 주변 상권을 장악하는 방법이었다. 중앙로는 개설 때부터 도로 폭이 기존 신작로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대구읍성을 허물고 낸 사성로의 폭이 약 9.2m였고 십자대로도 폭이 10.2m였는데 중앙로는 2배가 넘는 22m에 이르렀다. 게다가 대구역에서 곧바로 도심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라는 매력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중앙로 양쪽으로 여관과 극장, 양복점과 술집, 잡화상 등을 촘촘하게 열고 길의 주인 노릇을 하려 했다. ◆극장과 양복점, 금은방 개설 당시 중앙로는 동성로와 연결됐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좀체 끌어들이지 못했다. 북성로와 남성로, 종로와 향촌동 일대에 집중된 상권이 쉽사리 옮겨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20년대 들어 농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대구시역이 확장되고 도심이 점차 팽창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의 유일한 오락시설인 극장은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던 그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도심이 유일한 입지였다. 기존 상권 지역은 상가가 빽빽해 넓은 부지를 구하기 어려운 터라 조금씩 활기를 띠는 중앙로가 최적지로 떠올랐다. 중앙로의 동쪽으로 1920년 대구극장의 전신인 조선관이 들어서고 송죽극장과 자유극장 자리에 잇따라 극장이 들어선 것도 이런 이유였다. 해방 이후 제일극장과 아카데미극장이 중앙로 남쪽으로 자리를 잡으며 중앙로는 극장의 거리가 됐다. 오랫동안 대구 사람들에게 “시내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중앙로를 지칭한 것도 그만큼 도심의 상징인 극장이 많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도심뿐만 아니라 외곽지에도 대자본을 무기로 복합상영관이 들어서면서 중앙로는 극장 거리의 면모를 급격히 잃고 말았다. 아카데미극장이 그나마 복합상영관으로 변신해 자존심을 지키고 있을 뿐 ‘시내’라는 대명사도 중앙로를 떠나고 말았다. 중앙로가 뚫린 초기 일본인들이 문을 연 점포 가운데 양복점이 여럿 있었다. 고객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한국인은 양복을 경제적 여유가 되는 상류층 일부만 입었을 뿐 본격적으로 양복이 보급된 건 해방 이후였다. 양복점 창업지로 가장 각광받은 곳이 바로 중앙로.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울과 전국 각지의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양복 유행이 불붙었고 대구역~중앙네거리 구간에 양복점이 속속 들어섰다. ‘휴전 이후 10년간 양복점을 경영하면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나돌면서 양복점이 최고의 성업을 누렸다. 재단사가 모자라 서울, 부산 등지에서 데려와 호텔에 투숙시켜 놓고 일을 시켰다고 하니 당시 경기를 짐작할 만하다.’(대구의 신흥가와 쇠퇴 골목, 매일신문 1975년 5월15일자 기사) 1970년대 중반에는 중앙로 남쪽까지 양복점이 우후죽순처럼 늘어 중앙로에만 100여개의 양복점이 난립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양복점의 고객 유치 경쟁이 치열해 한 업소에 사장이 5명이나 되는 곳도 있고, 매년 한번씩 신장개업 간판을 내거는 곳도 있다. 최근에 기성복이 쏟아져 나오며 양복점 경기도 주춤하지만 품질 면에서 차이가 나고 한국인 체격에 잘 안 맞아 아직은 심한 타격이 아니라고 업주들은 이야기한다.’(같은 기사) 중앙로 양복점들은 한때 반월당을 넘어 남문시장 네거리까지 줄을 이었으나 갈수록 대기업들의 기성복 공세가 거세지고 숙련된 재단사를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해방 이후 중앙로의 또 다른 명물은 금은방이었다. 미성당, 색동보석 등은 대구 사람이라면 결혼 예물을 준비하기 위해 한번쯤 들러봤을 만큼 유명했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향촌동과 화전동 일대에 산재해 있던 금은방은 대부분 교동으로 옮겨가 주얼리상가를 형성했다. 금은방 역시 중앙로의 성쇠 한 페이지를 기록한 업종이었다. ◆교통 요충지 스카이라인 1971년은 대구 도심 교통에 일대 변화가 생긴 해였다. 1917년에 뚫린 중앙로와 1966년 개통된 통일로(대구역~도청교)가 경부선 철길 아래로 연결돼 대구 도로의 남북축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 1960년에 동인·태평지하도가 뚫리긴 했지만 폭 35m의 대구역 지하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구역 지하도는 대구 도심을 경북도청과 동대구역으로 연결시키면서 1905년 경부선이 운행을 시작한 이래 끊겼던 남북을 60여년 만에 하나로 잇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구역 지하도 개통 이후 중앙로는 명실상부한 대구의 중심지가 됐다. 이미 1967년에 지금의 달구벌대로인 서성네거리~한일극장 구간 도로가 확장돼 동서축을 갖추고 1969년 동신교가 놓인 터에 남북축까지 이어졌으니 교통의 요충지로 기능할 만했다. 특히 중앙네거리는 동서남북을 잇는 교차로로 1970년대 최고의 상권밀집지역이 됐다. 길의 변화는 하늘과 맞닿는 선의 변화도 가져왔다. 중앙네거리 일대로 고층건물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것이다. 단층의 한옥, 2층의 적산가옥이나 상업건물이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당시에 10층이 넘는 건물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1970년 중앙네거리에 처음 들어선 건물은 대구은행 본점(현재 중앙로 지점)으로 지하1층, 지상10층이었다. 해방 후 대구 최초의 지방은행으로 1967년 개점한 대구은행은 대구의 중심에 본점을 세움으로써 대구 사람들에게 지역 은행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1년과 1973년에는 중앙로를 따라 한일호텔과 로얄호텔이 각각 11층과 10층 규모로 세워져 대구은행 본점과 함께 도심 스카이라인을 연결시켰다. 커피숍과 고급 음식점 등을 갖춘 도심의 호텔은 사업상의 만남은 물론 예의를 갖춰 맞선을 보는 최고의 장소로 각광받았다. 로얄호텔 커피숍은 길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넓은 유리창으로 돼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맞선 장면을 지켜보는 재미가 적잖았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10년 02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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