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도심] (32) 중앙로 ② 사라져간 이름들 | |||||||||||
◆대중음악과 오리엔트 레코드사 1950년 한국전쟁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대구를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의 수도로 만들었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국의 중심 역할을 하며 많은 작가와 작품을 낳았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대구의 오리엔트 레코드사가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 중앙로 옛 자유극장 옆에서 악기점을 하던 이병주씨가 1947년 설립한 오리엔트 레코드사는 전쟁을 거치는 동안 대중음악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신세영의 ‘전선야곡’ 금사향의 ‘님 계신 전선’ 등이 오리엔트에서 제작한 대표적 음반이다. 레코드사는 1, 2층 100㎡(30여평) 건물에 들어섰는데 방음시설이라곤 군용담요를 몇 겹으로 얽은 게 전부여서 한밤중 작업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오리엔트와 깊은 인연을 맺은 작곡가로 박시춘을 꼽을 수 있다. 서울에서 ‘비내리는 고모령’을 발매해 히트를 쳤던 그는 대구로 내려와 오리엔트의 작곡가로 활약하면서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전우야 잘 있거라’ 등을 만들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오리엔트 레코드사는 음반 출간은 물론 신인 가수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오리엔트에서 개최한 가요콩쿠르에서 뽑혀 데뷔한 가수로 고화성, 도미, 방운아 등이 있었다. 1958년 남문시장네거리에 있던 대도극장에서 열린 오리엔트 레코드 취입가수 선발대회에서는 남일해가 발굴됐다. ‘찾아온 산장’ ‘이국땅’ ‘첫사랑 마도로스’ 등을 히트시킨 그는 영화배우로도 활약하며 1950년대 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음악감상회와 녹향 1946년 10월 대구에서는 ‘예육회'(藝育會)라는 단체가 창립됐다. 해방 후 음악 문학 미술 사진 무용 영화 등 예술 전반에 걸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이름과 창립 취지를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침착히 장래를 내다보는 여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겠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연구하고 생활에 예술을, 사회에 문화를 가져오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나아가서는 일반 국민에게 교육하고자 하는 뜻을 합해서 발족했다.’(예육회의 발자취) 예육회는 그해 10월 첫 음악감상회를 가진 이후 지속적으로 감상회를 열면서 대구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뒤로 향음회, 향성회, 애향회 등의 모임이 속속 생겨 음악을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 지금이야 각종 매체와 다양한 공연 등을 통해 자유롭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지만 레코드를 통해 음악을 접할 수밖에 없던 산업화 이전에는 음악감상회가 음악 발전에 끼친 영향이 막대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음악감상실인 ‘녹향’ 역시 음악감상회의 활동과 함께 문을 열었다. 예육회 멤버였던 이창수씨가 함께 모여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녹향은 향촌동 지하다방에서 시작해 10여 차례나 장소를 옮긴 끝에 현재의 중앙로 옛 대구극장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전쟁 기간 전국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 녹향은 가곡 ‘명태’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짝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양명문 시인이 환도 후 서울로 돌아가면서 녹향에서 썼다며 이씨에게 준 시가 바로 명태다. 녹향이 음악감상회를 도맡아 하던 대구에 음악감상실이 새로 생긴 건 1959년의 일이다. 이때 문을 연 곳이 시보네와 하이마트다. 시보네는 경음악을 주로 틀었고 하이마트는 고전음악을 위주로 했다.
◆서점이 문을 닫은 거리 1960년대 이후 중앙로는 서점의 거리라고 불릴 만했다. 1945년 근대식 이름인 본영당서점이 중앙로에 문을 연 이래 청운서림, 학원서림, 대구서적, 제일서적 등 지역의 토종 서점들은 1990년대까지 중앙로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와 함께 태극도서, 일신기독서점, 대우서적, 분도서점 등이 중앙로 주위로 몰리면서 “책 사러 중앙로 간다”는 말이 대구 학생들에게 일반화됐다. 책이 귀하던 시절 서점은 젊은이들에게 단순히 책을 사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서점에서 만나자”는 약속 장소가 되기도 하고 만남을 기다리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여유로운 휴식처가 되기도 했다. 책이 귀하던 시절 서점은 신간에 목말라하던 학생들을 ‘서서읽기’의 달인으로 만들었다. 요즘의 대형 서점처럼 앉아서 책을 읽을 만한 공간은커녕 통로에까지 책을 쌓아둘 만큼 서점 규모가 크지 않던 때였으니 편안히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종업원 눈치를 보느라 보던 책을 꽂아뒀다가 괜스레 서가를 한 바퀴 돈 뒤 다시 꺼내 이어서 읽고, 시내 볼일이 끝난 뒤 다시 와서 이어 읽기를 몇 번씩 해야 했다. 속내를 아는 종업원들은 영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모른 체해 줬으니 지금으로선 생각하기 힘든 풍경이다. 2000년대 들어 교보문고, 영풍문고 등 자본과 유통능력을 갖춘 대형 서점들이 대구에 진출하고 인터넷 판매가 활성화되면서 중앙로 서점들은 속속 문을 닫았다. 대구 서점가의 간판격이던 제일서적마저 중앙네거리로 옮겼다가 2006년 폐업하니 중앙로는 10여년 만에 서점 찾기 힘든 거리가 되고 말았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
기사 작성일 : 2010년 02월 1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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