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대구 도심]1923년 기생-양반집 아들 情死 전국 떠들썩 |
남존여비, 남녀칠세부동석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1920년대. 본격적인 근대화와 함께 떠오른 남녀평등, 여성해방 사상은 자유연애 풍조를 열병처럼 유행시켰다.
극장을 비롯해 음악회장이나 강연회장 등은 구경뿐만 아니라 이성을 만나기 위해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서는 젊은이들이 넘쳤다. 이상화를 비롯해 조혼 풍습으로 어릴 때 결혼한 남성 예술가들 중에는 화려한 연애 편력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은 이도 적잖다. 남성의 자유연애는 쉬쉬하며 덮었지만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비난이 따가웠다. 신여성들의 사생활은 잡지의 좋은 기사거리가 됐고, 경쟁적으로 기사를 싣다 보니 지어내는 이야기도 더러 있었다. 이 때문에 주위를 떠나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1923년 대구는 물론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구 기생 강명화의 정사(情死)는 당시의 연애 풍속과 남녀`반상 차별이 충돌한 대표적 사건으로 꼽힌다. 양반 가문 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기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 강명화는 자살하고, 남자 역시 뒤를 따른다. 그들이 죽은 뒤 이를 다룬 영화 ‘비련의 곡’이 제작, 상영돼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1926년에는 극작가 김우진과 가수 윤심덕이 현해탄에서 함께 자살하는 사건이 생겼고, 윤심덕이 부른 노래 ‘사의 찬미’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사건이 유성기 음반 보급의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이 전시체제에 들어가고, 식민지인 조선도 병참기지가 되면서 자유연애 풍조는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근대 초기의 가치관 충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자유연애와 남녀평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김재경기자 |
기사 작성일 : 2009년 10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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