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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향기] 나의 설날 -박연순 2002/02/07-

思美 2010. 7. 2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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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향기] 나의 설날                                2002/02/07

 

어린 시절 난 설빔을 입고 부푼 마음으로 시골 할머니 댁에 간다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부러워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시골길을 가는 대신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 ‘나의 살던 고향은~’ 이런 노래를 시키시곤 했다.

내게도 새 옷이나 맛난 음식들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흥겨운 여담으로 떠들썩한 큰집 앞마당, 만원버스에 실려 이리저리 부대끼며 덜컹덜컹 찾아가는 시골 오솔길, 이런 풍경들은 항상 부러움과 소망의 대상이었다.

나의 친정 아버지는 이북이 고향으로, 단신으로 월남하신 실향민이었다. 가족을 고향에 두고 홀로 타향에서 지내는 외로움 때문인지 식구들에게는 늘 따뜻하고 가정적이었던 분이라 우리 형제들은 별 불만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해마다 돌아오는 설날이니 추석이니 하는 명절이 되면 괜스레 부푼 명절 분위기에 우리 식구는 아무도 끼지 못했다. 스타들이 화려한 한복을 입고 나오는 텔레비전 앞에 멍한 눈으로 앉아 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잃은 적도 없는 고향을 아버지와 함께 애닳아하곤 했다.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또 이산가족 상봉 운운하는 말이 오갈 때마다 아버지의 가슴은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혹시나 하던 기대가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뀔 때마다 아버지의 한숨은 늘어났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늘어났다. 어려서는 철이 없어서, 커서는 괜히 쑥스러워서 위로 한번 제대로 못해 드린 것이 지금도 못내 아쉽다.

그렇게 고향에의 소망만 품은 채 아버지는 고인이 되셨다. 생전에 못 가신 고향집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이제는 당신이 설날 노래를 부르고 계실까? 당신이 눈감는 순간까지 그리워하신 아버지의 고향, 해주가 여전히 갈 수 없는 나의 고향이 돼 마음을 아리게 한다.

햇볕정책, 화해무드 운운하며 통일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은 요즘, 이산 1세대들이 더 이상 한스럽게 눈을 감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어느새 아버지가 가신 지도 10주기가 됐다. 올해에는 공교롭게도 음력 설날이 아버지의 양력 기일이 된다. 이런저런 핑계로 매년 성묘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번 설날에는 꼭 찾아 뵙고 어린 시절 불렀던 그 노래들을 다시 불러 드려야겠다.

박연순(포항 전기제어설비부 이동걸 씨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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